노란봉투/ 류영택
밀린 외상값이 얼마였더라.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여자의 목소리를 확인하고부터 나는 그녀에게 받을 돈을 셈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달 동안 깔아놓은 돈이라 어느 날짜에 얼마인지 일이리 기억할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고 장부라도 해뒀으면 모를까. 돈을 받을 사람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줄 사람이 기억하고 있기를 바라는 건 무리였다. 설사 알고 있다고 해도, 기억에 없다며 여자가 딱 잡아떼면 달리 받아낼 방법도 없었다.
"어딘지 아시겠지요?" 여자는 그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가만있자! 큰 길옆 어디라고 하는 것 같았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엉뚱한 생각을 하느라 오늘 같은 일을 종종 겪다보니 나름대로 길을 찾는 노하우가 생겼다. 대충 감을 잡고 차를 몰고가다보면 맞아! 저 앞에 보이는 은행건물에서 우회전을 하라고 했었지.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던 여자의 목소리가 되살아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왜 장부를 하지 않았었지. 그 여자를 너무 믿었었나. 아니면 동그란 눈이 예뻐서? 자문자답을 하다말고 피식 웃었다. 둘 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여자가 타준 냉커피 때문이었다.
여자의 사무실은 내가 일하는 가게에서 몇 정거장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건설현장에 쓰이는 거푸집을 임대하는 업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사장은 아니었다. 회사 안주인인 그녀는 그곳에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여자가 오기 전부터 'K상사'와 거래를 트고 있었다. 회사에는 물건을 상하차하는 대형지게차가 한 대 있었다. 나는 지게차펑크를 때워주기 위해 자주 그곳 현장에 갔었다.
다른 일보다 작업도 쉽고, 일이 끝나면 현금을 받는 알짜배기 거래처였지만 나는 K상사에 일을 갈 때마다 짜증이 났다. 사무실 경리와 마주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경리의 눈빛과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경리는 키 크고 잘 생긴 손님이 찾아오면 자리에 앉기를 권하며 "어떤 차를 드시겠어요?" 교양 있는 사람처럼 굴다가도, 허름한 작업복 차림을 한 현장 사람에게는 금세 태도를 바꿔버렸다. 행여 소파에 먼지라도 묻힐세라 새치름하게 눈빛으로 쏘아보기까지 했었다.
나는 경리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리는 틈만 나면 책을 읽고 있었다. 소설, 산문집 읽는 책도 다양했다. 그만큼 책을 봐왔으면 내공이 쌓였을 만도 한데, 경리는 책을 통해 내면의 지식을 쌓기보다 겉멋만 잔뜩 들어있었다. 여자나이 서른이면 겸손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마음 같아서는 당장 혼쭐을 내주고 싶었지만 내게는 눈빛하나로 상대를 주눅 들게 할 카리스마도, 논리적으로 상대를 압도할 입심도 없었다.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며 괜히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본전은 고사하고 벌집을 쑤셔놓는 꼴이 되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리의 못된 버릇을 고치려면 입이 딱 벌어지도록 무식하게 한 마디 하는 게 차라리 먹혀들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일은 더더욱 못할 노릇이었다. 더 이상 경리와 마주치지 않으려면 거래를 안 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펑크를 때워달라는 전화였다. 나는 바빠서 갈 수 없다며 다른 곳에 알아보라고 했다. 이제 경리얼굴만 떠올려도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에잇, 빌어먹을……' 애써 참았던 감정을 주체 할 수가 없어 나는 들고 있던 수화기를 쾅! 내려놓았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보니 아차 싶었다. 뭔가 이상했다. 아무래도 경리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여보세요, K상사데요." 신경질적인 경리의 말투와 달랐던 것 같았다. 약간 허스키 하면서도 착착 몸을 휘감아오는 찰진 음성이었다. 이런 실수가 있나! 그렇잖아도 미워죽겠는데 이게 다 그 잘난 경리 때문에 생긴 일이라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화를 삭이느라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지만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줄담배를 피우며 한참을 앉아 있자 다시 전화가 왔다.
"K상사데요. 바쁘신 일 끝냈으면 와 주시겠어요?" 아까 그 음성이었다. '그래, 이런 여자가 교양 있는 여자지.' 목소리만으로도 그동안 경리에게 눈총 맞은 것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일을 끝내고 사무실문을 두드렸다. 문이 반쯤 열리고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저씨, 안으로 들어오세요." 여자의 말에 나는 일이 바빠 그냥 가야 된다고 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선걸음에 돈을 받아 챙기고는 재빨리 현장을 빠져나오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아무리 바쁘셔도, 목이라도 축이고 가세요." 착착 달라붙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신발을 벗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파에 앉아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삼십 대 중반 쯤 돼 보이는 여자는 저번 경리보다는 조금 덜 늘씬했다. '싸가지가 있어야지' 그동안 공주병에 걸린 경리에게 눈총 맞은 것을 생각하면, 키는 조금 작아도 커피를 타는 여자의 뒷모습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예뻐 보였다.
여자는 유리컵에 얼음을 둥둥 띄운 냉커피 두 잔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아저씨, 얼음이 녹으면 드세요." 여자는 자신을 따라 하라는 듯 빨대로 유리컵을 천천히 저었다.
"땡볕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려면 힘드시겠어요?"
"늘 해오던 일인걸요."
여자는 정감어린 목소리로 이런저런 것들을 내게 물어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여자가 또 있을까. 나는 컵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녀의 묻는 말에 대답만 했다.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눈이 부셔 가슴이 막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가게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지금까지 마신 커피 중 오늘 마신 커피가 제일 맛이 좋았던 것 같았다.
미분양아파트가 속출하자. 여자의 회사도 직격탄을 맞았다. 현장에 거푸집을 정리하던 서너 명 되던 직원도 한 명뿐이었다. 내가 그곳을 찾을 때마다 여자는 사무실에 있지 않고 현장에서 직원들이 해오던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작업을 하며 곁눈질로 여자의 모습을 훔쳐봤다. 그녀는 사무실문 앞에 놓여 있던 하얀 운동화 대신 투박하게 생긴 안전화를 신고 있었다. 여자는 벌겋게 코팅이 된 장갑을 끼고 합판에 박힌 못을 빼고, 못을 빼낸 합판을 한곳에 포갰다. 그 일이 끝나자 거푸집을 정리했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세상일이라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니 마음이 아파왔다.
내가 작업을 끝내자. 여자는 햇볕에 벌겋게 탄 얼굴로 다음에 돈을 받아 가면 안 되겠냐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나는 여자가 미안해 할까봐.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현장을 빠져나오려다 말고 차를 세웠다. 백미러에 여자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는 지게차에 오르고 있었다. 잠시 전 포개놓은 물건들을 한곳으로 옮기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 흔한 자동차면허증도 없는 사람이 어찌 지게차에 오를 생각을 다했을까. 불안한 마음에 나는 차에서 내려 그 모습을 지켜봤다.
여자는 서툰 손놀림으로 레버를 조작했다. 중심을 잘못 잡아 물건이 한쪽으로 쏠렸다. 저러다 무너지지. 다시 자리에 내려놓으려고 하자 포개져 있던 거푸집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잠시 멍해 있던 여자는 무너져 내린 물건을 다시 쌓았다.
내가 현장을 찾을 때마다 지게차를 다루는 여자의 손놀림이 달라져있었다. 처음에는 허리정도 쌓았던 짐이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 높아져있었다. 마치 쇠똥을 굴리는 쇠똥구리처럼 여자는 높다랗게 쌓은 합판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도 가고자 하는 자리를 잘도 찾아갔다.
"이젠 눈감고도 하시겠습니다."
그녀는 쑥스럽게 웃었다. 그게 여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녀가 능숙하게 지게차를 다룰 동안 내가 받을 외상값도 그 만큼 늘어나 있었다.
외상값이 얼마였더라. 내가 셈했던 것은 돈이 아니었다. 그곳을 찾을 때마다 여자가 타준 커피한잔과 자리에서 일어나면 내게 건네던 노란봉투였다. 수고하셨어요. 미소 띤 얼굴로 내민, 모서리가 가지런한 지폐를 받아들 때면 나는 왠지 돈을 더 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한 달 치 월급이 들어있는 노란봉투를 받아든 기분이었다. 나는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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