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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얼음재 / 김정화

얼음재 / 김정화

 

 

 

가끔 겨울산을 오른다. 운이 좋으면 서리꽃이 핀 고사목과 설화雪花그림자를 안은 화석 같은 바위를 마주할 수 있다. 그러한 겨울산에 눈발이라도 내리면 사람도 순백의 고운 나무가 되는 것을.

고운 빛, 고운 색깔이란 말에서 문득 젖은 음성 하나 묻어 나온다.

"색깔 고븐 옷 좀 입고 댕기라."

아득한 내 어머니 목소리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겉모습에 자신을 잃어간다. 그러다 보니 새 옷을 살 때마다 옷 색깔을 많이 고민하게 된다. 채도가 낮거나 무채색을선호하는 편인데, 이러한 취향은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재기발랄한 여고생 때도 중늙은이처럼 회색 스웨터나 검정 바지를 주로 골랐다. 그러면 어머니는 "야야, 그기 그래 맘에 맞나?" 하며 옷값을 선뜻 치르지 못한 채 화사한 색깔 옷에 눈길을 주고 서성였다.

다채로운 색이 세상에 많지만, 어머니의 색은 '고븐 색''안 고븐 색'인 두 종류로만 나뉜다. 옥색과 분홍색, 참외 물이 든 것 같은 치잣빛과 봄꽃처럼 밝은 색은 '고븐 색'이고, 회색과 검정, 흙탕물을 섞은 듯한 갈색과 겨울 부엽토 같은 칙칙한 색깔은 '안 고븐 색'이다. 그러니 내가 입은 어두운 옷은 당최 어머니 눈에 찰 리가 없었다.

라스트 콘스트라는 영화를 종종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이 가슴을 때린다. 불치의 병에 걸린 스텔라는 연인 리처드가 재기의 무대에 서는 날, 자신을 위한 피아노 연주곡 '스텔라에게 바치는 콘체르토'를 들으며 생을 마감한다. 삶의 끝도 언제나 혼자인 법, 그러나 사랑의 눈길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마음이 무너진다. 저승의 어머니는 내게 얼마나 할 말이 많을까. 당시 '고븐 색'만을 고집한 건, 훗날 딸의 삶도 곱게 채색되길 바라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일 게다.

바위능선을 따라 비탈진 산길을 걸어본다. 겨울산은 온통 적갈색 마른 잎이 낮게 엎드려 있다. 키 큰 산벚나무가 싸리비 같은 가지만 남긴 채 옹이진 속을 훤히 드러내었다. 저 나무들도 지난봄에는 녹의홍상 치장을 하고서 행락객의 눈길을 옭매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의 겉만 보고 곱다고 생각한다. 봄꽃과 여름의 녹음과 가을 산의 갖가지 색이 자연의 '고븐 색'이라 여긴다. 그러기에 우리는 꽃이 진 자리와 단풍을 떨어뜨려 낸 나무를 눈여겨 보려 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이란 열정 뒤에 남는 것이다. 한나절 뿜어대던 해의 그림자인 석경夕景에 탄성을 지르고, 화르르 무너져 내린 동백꽃 잎에 눈길 떼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겨울나무가 굳은 몸으로 서 있어도, 강물을 건너오는 빈산이 꽃빛을 담아내지 못해도 그것은 단지 회색이거나 갈색이라고 부를 수 없다. 심안을 뜨고 본다면 사계절 빛깔이 스며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자연의 진정한 색은 겨울색이라 생각된다. 황량하고 삭막하다고 여기는 겨울의 '안 고븐 색'이야말로 한 해의 결산인 셈이다. 유채색 계절에 뒤이은 겨울 빛깔은 나머지 계절을 모두 더한 색이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고븐 색'이 아닐까.

차가움도 뜨거움 뒤에 따른다. 그러니 열정이 식었다고 냉정히 돌아설 일도 아니듯 싶다. 때로는 해토머리 무렵, 물기 없는 화초 뿌리에서 숨은 촉을 발견하듯이 비워낸 것들에 대해 되돌아보는 용기도 가져야 한다. 내 마음 둥치에는 얼마나 많은 무심결이 박혀 있을까.

카메라 렌즈를 통하면 세상이 새롭게 보인다. 그동안 조리개를 열고 앞의 대상만 잘 찍으려 카메라를 바싹 들이대었다. 그러다 보니 심도 깊은 사진을 찍은 일이 드물었다. 사는 일도 마찬가지일 게다. 현실의 집착에서 벗어나 지나온 길의 틈새도 포용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을.

타는 게 어디 불꽃뿐일까. 나는 이번 겨울 어느 날, 추흘산 얼음계곡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다. 밤새 얼었던 계곡물이 한낮의 햇빛에 서서히 녹기 시작할 때, 내 눈에 착시현상이 일었다. 얼음에 불꽃이 일고 뚝뚝 잿물이 떨어지기를 반복하더니 저녁 무렵이 되자 얼음은 더 녹지 않았다. 가장자리에 남은 것은 영락없이 타고 남은 얼음재였다.

파사한 얼음재는 청기 어린 순백의 색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떤 색보다도 '고븐 색'이었다. 색깔 고운 옷 한 벌 입은 계곡물이 얼음재 아래로 묵묵히 흐르고 있었다.

하얀 얼음재, 나는 자연의 겨울색에서 잊었던 목소리 하나 기억해 내었다.

"색깔 고븐 옷 좀 입고 댕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