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수 없다 / 박양근
난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친구들이 자랑을 하여도, 어느 날 갑자기 직장동료들이 만면에 웃음을 날리면서 호들갑을 떨어도 난 그렇지 않을 거라 작정하였다. 너도 별수 없을 거라 콧방귀를 뀌었으나 마이동풍을 자처하였다. 나만큼 마음이 무거운 선배 교수조차 변심했지만 난 무심하리라 작정했다.
세상에는 겉 표정과 속마음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그런 예로 갑을관계가 있다. 따지고 보면 세상살이 모두가 갑질 을질로 이루어진다. 회사 사무실 풍경만 떠올려도 된다. 아랫사람은 상사가 부당하게 꾸짖어도 겸손하게 ‘옳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해야 한다. 을의 신분을 거부하는 것은 신상에 좋지 않다. 갑이라고 별수 없다. 부하가 잘하여도 목소리를 착 깔고 ‘더 잘해’라고 주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물리기 쉽다. 누구나 겉과 속이 다른 처지에 놓인다는 뜻이다.
지금 나는 을보다 갑이 되는 때가 더 많다. 경상도 집안의 가장이므로 난 당당한 갑이다. 양친이 돌아가시면서 나의 유일한 갑이 사라졌다. 지하철 좌석에 앉아도 눈치 볼 필요가 거의 없다. 환갑이 지나 웬만하면 나이 차에서도 갑에 속한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강의실에서는 학생들이 내 강의를 잘 들어준다. 외부 강의를 나가면 교수대접을 해주니 억지로 불려나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젊은 시절처럼 큰소리치지 못하고 그저 참기만 하던 을이 더 이상 아니다. 생활이 살판나지는 않지만 즐길 만하다.
그런 내가 주눅이 드는 을질 이야기가 하나 있다. 친구 중의 누군가 오늘도 을질을 당했다고 고백하면 순식간에 너도나도 그 화젯거리로 물려간다. 신분과 나이는 물론 남녀구분도 소용이 없다. 사회에서 내로라하는 친구조차 을을 자처한다. 을이라는 신분이 즐거워죽겠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온갖 수모의 사건(?)을 다 펼쳐낸다. 받지도 못할 돈주머니를 탈탈 턴다. 한번이라도 더 안아볼 순서를 기다리며 안달한다. 배달원을 자청하여 백화점에서 한 시간도 기다린다. 방 청소와 부엌질도 마다치 않는다. 목욕시켜주라는 엄명을 기다리지만 그런 영광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그 모든 일이 경박한 짓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체통과 체면을 일순간에 잃어버리는 것이다. 친구들 모두가 저렇게 경박해지더라도 난 변하지 않으리라. 조금은 배신당한 기분으로 조금은 부러운 심사로, 그들을 은밀하게 경멸하곤 했다.
‘별수 없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잘 나고 힘이 있어도 그렇고 그런 인간에 불과하다는 뜻을 지닌 말이다. 병과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별수 없다. 배설통 앞에 서면 모두 별수 없다. 만일 세상에 진짜 별수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다면 보통 사람으로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별수 없다는 말 잎에서는 누구나 인간이 되니까 어찌 아니 좋은가.
그 을의 신분을 작년에 취득하였다.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허허 하하” 하며 을의 신분으로 자원 입소하였다.
할아버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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