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지게 / 류영택
"수정아!"
등 뒤에서 딸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누가 내 이름을 부를까?' 딸아이는 다소 놀라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고, '저 여편네가 웬일이야!' 아내는 돌아보기도 전에 상대가 누군지를 알아챈 것 같았다. '언제부터 아내의 호칭이 바뀌었나!' 나는 의아한 모습으로 뒤를 돌아봤다.
평소 아내와 친하게 지내는 이웃집 아주머니였다.
"시장 보러 왔나?"
아파트에서 멀지도 않은 엎어지면 코 닿을 시장바닥에서 저리도 반가울까. 서로 손을 맞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금세 헤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매일 같이 붙어 다니면서 무슨 할 말이 저렇게 많을까? 나는 저만치 떨어져 아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아들이 곁에 없어 다행이지. 지금까지 제 엄마를 부를 때나 찾을 때, 꼭 자신의 이름을 불렀었는데, 딸아이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으면 자신이 소외됐다는 기분에 얼마나 섭섭해 할까.
내가 어릴 때는 상대를 부를 때는 지금처럼 누구 아빠, 누구 엄마로 불리지 않고 양반이나 띠기(댁) 으로 불렀다. 같은 동네 사람끼리 혼인한 사람은 본동양반, 본동띠기(댁) 동네에서 가까운 곳을 장가든 사람은 근동. 창녕, 의령, 합천 등 강 건너로 멀리 장가든 사람은 그 지역의 명칭을 따서. '창녕양반' '댁'자를 붙여 불렀다.
당시에도 누구엄마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들 이름자를 따서 불렀다. 다만 그 이름자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사람, 그 집 가장인 아버지뿐이었다.
우리 집에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가 어머니를 부를 때 '선'이라고 했다. 집안에 맏이였던 누나의 이름이 '分善' 이었는데 그 끝자릴 따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하루는 집을 나섰던 아버지가 삽짝까지 돌아오기가 그랬던지 이웃집과 맞붙은 담을 넘겨다보며 선아, 선아 어머니를 불렀다. 그 소리에 놀라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던 누나가 고개만 내밀고 있는 아버지를 향해 대답을 했다.
"아부지, 와 예?"
"엄마, 어데 갔노?"
화장실에 간 줄도 모르고 누나와 나는 어머니를 찾아 사방을 헤맸다.
그러구러 내가 초등학교 사학년이 됐을 때, 누나가 시집을 갔다.
누나가 시집을 갔으니, 출가외인인 누나의 이름대신 이제부터 다른 이름을 부를 것이라 생각했다. 형제들은 가운데 자가 영자 돌림이고. 끝 자가 中, 鎭, 澤 이었다. 언감생심 내 이름(澤)으로 불리기는 애당초 틀렸고, 서열상 집안의 맏이인 큰형은 자신의 이름인 中아 하고 부를 것이다 생각했고 가족들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초조하게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큰형의 바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다음 왕위를 계승할 세자 책봉을 하는 양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느라 섣불리 이름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부를 때마다 마땅히 부를 이름이 없어, '봐라!' 아니면 '어이요!'로 불렀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큰형의 조바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눈밖에 날까봐 조심하면서도 물지게에 물을 져다올 때면 담벼락에 물통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들릴 때가 많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예전과 별로 달라 진 게 없다는 생각에서 그랬던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평소 큰형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큰형이 하는 일은 늘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하는 일마다 못마땅해 했었다.
그날은 밤이 이슥하도록 장에 가신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다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검은 그을음을 내며 타들어가는 호롱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가장이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잠을 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간간이 들려오던 동구 밖 개 짖는 소리도 끊어지고, 스쳐가는 칼바람에 파르르 떨려오는 문풍지 소리가 시린 등골이 오싹해지도록 귓전을 파고들었다.
오늘도 긴 밤을 지새워야 하나. 주막에 내걸어둔 등불마저 꺼져갈 시각, '어험' 모든 것이 일순간 정지되고 말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삽짝을 들어서는 아버지의 기침소리에 식구들은 신발도 신지 못하고 후다닥 뛰쳐나가 서열 순으로 도열했다. 아부지 다녀오십니꺼!'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어험' 아버지는 다시 기침을 하고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진아, 아이들 재우지 않고!' 술이 거나하게 되신 아버지는 그 말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대명사를 부르기까지는, 봄에 시집간 누나의 배가 남산만큼 불러올 긴 시간이었다.
술기운을 빌려 말을 했지만, 큰형이 마음에 걸려 미루어 왔을 뿐, 아버지는 진작부터 둘 째 형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 봄, 밭갈이를 하러 들에 나갔던 큰형은 입에 채워둔 소 입마개도 벗기지 않은 채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꼭 그 일 때문에 그런 건 아니겠지만, 큰형이 도망을 치던 날 벗어놓은 작업복을 움켜잡고 눈물짓던 어머니의 그렁그렁한 눈을 보면서 큰형이 혼자 삭혀야 했던 설움을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덩치가 작고 마음 여린 큰형보다는 덩치도 크고, 인물 좋고, 야심 많은 둘째형을 집안의 기둥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지금은 아버지도 큰형도 다 고인이 됐지만, 아버지 기일 날 큰형이 내게 했던 말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큰형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장조카의 어깨를 두드리며 내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동생, '야가 유도가 4단이다."
자신의 손을 위로 뻗쳐야 머리에 닿을 정도로 건장한 아들의 모습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던 큰형의 모습은, 아들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쌓아 놓은 자신의 한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작은 체구로 살아오면서 얼마나 억눌렸으면, 나는 큰형의 모습에 울컥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같은 자식인데 누구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겠냐마는, 부모의 사랑을 더 받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큰형이 마음속으로 느꼈던 그 소외감은 한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느라 넋 놓고 있어요?"
아내가 내 팔을 끄잡아 당겼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나는 아내가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
"내가 언제?"
"턱을 내놓고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라니! 누가 봤을까봐 겁나네요."
나는 얼이 빠져 서 있었던 내 모습이 쑥스러워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날마다 보면서 무슨 이야기가 그래 길어!"
"그냥."
앞서 걷는 아내와 딸아이의 모습을 바라봤다.
손을 맞잡고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렇게 정감 있어 보일 수가 없다. 수정의 한 손은 내가 잡을까. 아니지. 아들이 그런 모습을 본다면 홀로 버려졌다는 마음에 지난 날 큰형이 그랬던 것처럼, 물통대신 베란다의 간장독을 걷어차지나 않을까.
아버지의 실수였다. 맏이의 힘이 어머니의 대명사에서 나온다는 걸 알았다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부를 때 중(中)아 하고 불렀어야 했다. 얼마나 서러웠으면, 왜소한 체구에 물지게로 물을 져다 나르며 쾅쾅쾅 물통에다 한을 달랬을까. 담벼락에 부딪히는 물통소리가 내 귀에는 어머니를 원망하는 소리, 에밀레종소리 같이 들렸었다.
걸음을 서둘다 말고 나는 아내를 불러본다.
"환아!"
수정이의 손을 잡은 채 앞서 걷던 아내는 휘딱 나를 돌아보며 턱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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