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 / 김희자
수월관 뜰에 진 왕벚꽃이 서럽도록 곱다. 까치발을 딛고 담을 넘은 바람이 꽃 진 자리에 슬며시 눕는다. 떨어진 꽃잎이 바람에게 몸을 맡긴다. 축 늘어진 나뭇가지에서 못다 내린 눈꽃이 내린다. 꽃이 꽃답게 피는 날은 고작 열흘. 꿈결 같은 며칠이 지나면 꽃은 다시 새 생명의 잉태를 위하여 몸을 부순다. 서러워서 아름다운 것인가. 아름답기에 서러운 것인가. 봄 한 철 피었다가 저무는 꽃잎들을 차마 밟지 못하고 나는 깊은 봄 속에 서 있다.
누각 아래로 낮은 바람이 분다. 바람 따라 몸을 뒤척이던 꽃잎들이 이리저리 흩날린다. 아쉬움 한 가닥에 몸을 붙든 꽃잎들이 눈처럼 펄펄 내린다. 꽃이 지는 걸 두고 어찌 바람을 탓할 수 있으랴. 때를 알고 돌아서는 것들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우리네 가는 모습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면 이승에서 놀다 가는 소풍은 멋질 것이다.
꽃이 저무는 모습을 보면 저마다 다르다. 언제 피었는가 싶어 뒤돌아보면 금방 저무는 꽃이 있는가 하면 시나브로 피었다가 언제 졌는지도 모를 꽃이 있다. 가장 화려한 순간에 미련 없이 통째로 저무는 꽃이 있는가 하면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마지막까지 머물다가 힘없이 지는 꽃이 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저무는 건 잠시라는 말이 있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인연(因緣)도 긴 설렘으로 왔다가 느닷없이 떠나기도 한다.
수월관에 올라서니 아득하게 떠오르는 스님 한 분이 있다. 담을 넘은 능소화가 빵시레 미소 짓고 서둘러 가을을 알리는 귀뚜라미가 귀를 열게 하는 밤이었다. 달빛이 누(樓)마루에 들자, 인심 후한 스님은 귀한 차(茶)로 지친 몸을 다독여 주었다. 연못에 찬 달그림자가 수월관에 스미고 절집 뒤란 대숲에서 오죽 스치는 소리가 심기를 맑게 하였다. 솔가지 사이로 보이는 달이 어찌나 밝았는지 그날만 생각하면 맑아지고 차오르는 달처럼 스님이 그리워진다.
건강이 좋지 않으셨던 스님은 아픔으로 인해 더 마음이 평안해졌다며 차를 달였다. 욕심을 갖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고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 지는 일도 안타까운 일만은 아니라고 하셨다. 수월관에 다시 서니 그 깊은 뜻을 알 것 같아 절로 미소가 번진다. 지금은 어디에서 공부를 하고 계실까. 스님은 언제나 곁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런 분이며 고요하게 피었다가 저무는 꽃과 같은 인연이다.
앞서 꽃 진 자리에 서둘러 돋아난 여린 잎들이 바람에 몸을 떤다. 언저리 연못가에 목련 한 그루가 서 있다. 못다 지는 게 아쉬웠던 것일까. 지는 때를 망각하고 매달린 꽃잎이 가슴을 물컹대게 한다. 하얀 목련만 보면 애잔하게 생각나는 여인이 있다. 목련이 꽃망울을 하나 둘씩 터뜨리기 시작하던 수년 전 봄날이었다. 우울증을 않던 이웃 여인이 스스로 몸을 던져 명줄을 끊었다.
그녀가 먼 길을 가기 이틀 전 길에서 만났었다. 어깨까지 흘러내린 머리에 뽀글뽀글 파마를 한 그녀는 꽃처럼 웃으며 반가워했다. 그 맑은 미소 뒤에는 이겨내지 못할 남모를 병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춘기의 두 딸과 금쪽같은 늦둥이 아들을 두고 그녀는 우울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저버렸다. 슬픈 기별을 들은 나는 가슴이 저미어 한동안 하늘을 쳐다보지 못했다.
한 가닥 남은 꽃잎이 가지를 흔드는 바람에 떨어진다. 혼을 내려놓고 훨훨 사라진 그녀의 모습과 흡사해 보여 가슴에 파도가 인다. 꽃 진 등짝의 허전함에 그녀의 아이들이 떠오른다. 이사를 했으리라 여겼던 그들은 둥지를 떠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살아간다. 꽃 지면 봄날이 깊어 가듯 남겨진 아이들의 상처가 아물어 세월 속에 묻혔으면 한다. 수월관에 앉았다가 잠시 담 밖의 서러움에 이끌렸다. 불혹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녀의 자나간 자리가 애달프고 꽃 진 자리에 아득한 그리움만 홀연히 남는다.
절집 마루에 오후의 봄볕이 든다. 꽃이 저무는 모습을 보면 우리네 인생을 보는 것 같다. 마지막 가는 모습을 스스로 아름답게 장식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없는 듯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도 있고 한순간에 미련을 떨어 버리는 허망한 사람도 있다. 어느 누구도 때가 되면 돌아서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지만 돌아서는 뒷모습은 못내 안타까운 마음을 일게 한다. 하지만 꽃이 저문다고 서러움만 남는 것이 아니며 지는 때를 알고 있는 것은 꽃만이 아닐 것이다. 미묘한 동물과 우리 인간에게도 마지막 가는 모습은 있으니 말이다.
떠나는 것은 다시 만나기 위함이라고 했다. 꽃이 져야만 잎이 나오고 열매가 맺히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화려하게 피었다가 지는 일만 남았을 때 추하지 않게 지는 꽃은 오히려 고요하다. 꽃이 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꽃이 다시 보이듯이 사람들의 인연도 비워져 있을 때 더욱 그리워지는 법이다. 그래서 꽃 진 자리는 가을 낙엽 지는 모습처럼 쓸쓸해 보이지 않는다. 꽃이 진 자리에 상처가 아물고 나면 새싹이 트고 씨앗이 벙글어 알곡을 맺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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