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이 / 권예란
겨울이 되니 배롱나무 한 그루가 미끈한 속살을 드러낸다. 나무는 제가 가진 것을 다 떨어뜨리고 나서야 고스란히 본 모습을 내보인다.
배롱나무의 짙은 분홍색 꽃은 초여름부터 피기 시작하다. 그 분홍색 꽃들이 올망졸망 피면 아담한 키의 여자 아이들이 머리에 꽃을 달고 서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지난 여름 창문으로 보니는 화사한 꽃들은 나에게 늘 환한 미소를 보내왔다. 그러나 이젠 가진 갓들을 다 버리고 나무만 멀뚱히 서 있다.
메마른 가지에는 빈 열매껍질만이 달려 있다. 말라버린 껍질조차 무겁게 느껴질 만큼 가느다란 가지들이다.
그 연약한 가지들에 많은 꽃송이와 열매를 품고 살았으니 대견하다. 그동안 꽃만 바라볼 줄 알았지 다른 것에는 무심했다.
배롱나무의 줄기에 작은 옹이들이 박혀 있는 것도 오늘에야 알아다. 긴 시간동안 꽃이 피어 있는 위쪽만 볼 줄 알았지, 나무 아래쪽에 굳은살처럼 박혀있는 오이가 있는 줄은 몰랐다.
울퉁불퉁한 옹이에 가만히 손을 대어 본다. 등딱지처럼 단단한 것이 손끝에 와 닿는다. 옹이는 나무의 상흔이라는데, 몸에 난 딱지를 뗄 때처럼 조심스러워진다. 비록 나무가 사람처럼 일일이 상처가 생긴 까닭을 말할 수는 없지만 아련한 아픔이 내 맘까지 전해진다. 차라리 나무가 그 까닭을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나 깊은 상처를 들춰내는 건 마음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밑동부터 뻗은 배롱나무의 나무줄기는 여섯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그 줄기마다 옹이의 모양이 다양하다. 어떤 것은 우물처럼 움푹 파였다. 그 깊은 곳에서는 튼실한 가지로 자라지 못한 한스런 이야기가 주절주절 흘러나올 것 같다.
어떤 것은 혹처럼 불쑥 튀어나온 모양을 갖고 있다. 그루터기가 반듯하지 않은 것을 보니 누군가의 힘에 의해 억지로 부러진 자국이다. 종종 이물이 옹이에 박혀 그대로 굳어진 것도 볼 수 있다. 이물은 나무줄기의 상처와 함께 아물어 버렸다. 저마다의 옹이는 한 그루의 줄기가 지켜내지 못한 나뭇가지의 안타까운 사연을 담고 있다.
또 어떤 사람으 제 몸에 없던 것도 받아들이며 함께 보듬으면서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마음속에도 크고 작은 옹이들이 많이 생겼다. 하늘을 향해 뻗다보면 자연스레 아래 줄기의 잎들은 햇빛을 받지 못한다. 결국은 제 몸을 위해서 아래 줄기는 죽고 만다. 나무의 아래 줄기처럼 스스로에게 상처 받아 생긴 옹이도 있고, 남에게 일방적으로 받은 상처 때문에 생긴 옹이도 있다. 그러나 이물까지 받아들여 제 몸으로 감싸 안은 옹이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 있는 나에게 돌멩이 하나를 꼭 감싸고 서 있는 배롱나무의 옹이가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상처 하나쯤은 갖고 산다며, 나무의 옹이에게 가장 진한 나무의 향이 배어 나오듯, 사람의 옹이에서도 가장 진한 삶의 이야기가 배어 나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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