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나무 / 최성희
검붉은 피가 툭 터져 나온다. 묵직하게 억눌려있던 답답함이 순간 시원해지는 것 같다.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며, 명치끝에 남아 있던 체증이 해소되고 있다. 손에 쥐고 있던 펜 모양의 사혈기가 스무 살 처녀의 손가락을 막 찌르고 나서 장한 일을 했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다.
후텁지근한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얼굴부터 시작하여 온 몸으로 땀이 빗줄기처럼 흘러 내렸다. 급한 심부름이라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런데 갑자기 앞이 뿌옇게 덮쳐 오더니 가슴이 답답하고 귀가 아득하며 공기의 압력이 느껴졌다. 자전거를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가슴을 쥐며 쪼그리고 앉았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었다. 가지고 있는 것도 없고, 자전거를 일으켜 세워 집까지 돌아갈 수도 없었다. '큰일 났네'만 내지르고 있었다.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시퍼런 가시를 지닌 탱자나무뿐이었다. 어디선가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사람이 급체해서 아무것도 안보일 땐, 어디든 찔러서 피를 내면 산다더라."
아마도 살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건져 올린 소리였으리라. 무슨 정신으로 탱자나무가시를 끊었는지 모른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몸에 서서히 감각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가물가물한 감각으로 손가락 여기저기를 찔러댔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느껴진 시간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손가락 여기저기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한숨과 함께 정신이 또렷해지며 답답했던 가슴이 탁 트이며 시원해졌다. 살 것 같았다. 압사 직전에서 헤어 나온 느낌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해방감이 순간 엄습하며 편안해졌다.
그 뒤로 나에게 탱자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었다. 나를 죽음으로부터 건져 준 은인이었다. 볼 때마다 사랑스러웠다. 마을 여기저기에 탱자나무가 많아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특히 버스를 타러 신작로까지 가려면 100미터 정도를 탱자나무를 벗하며 걸어야 하는데 그 길이 나를 더 없이 행복하게 했다. 탱자나무에게 말하는 습관도 생겼다. 나 혼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쌍방이 주고받는 소통의 대화였다. 탱자나무와 말하고 다닌다면 남들이 이상하다 할까봐 차마 말할 순 없었지만 나에게 아주 친밀한 친구가 생겼던 것이다. 전에는 밤에 혼자 그 길을 걸으면 무서웠지만, 그 뒤부터는 이상하리만치 든든하고 무섭지 않았다.
봄철에 틔우는 아름다운 새싹도 내가 좋아하는 색깔로 특별히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하얀 탱자 꽃이 필 때는 하나하나에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가슴 설레며 들여다보곤 했다. 파란색 탱자가 노랗게 익어갈 때쯤이면 그 향기에 도취되어 저만치에서 들려오는 버스 소리가 얄미울 정도였다. 꽃에서 피어나는 향기보다 탱자열매가 익어갈 때 나는 향내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노란 탱자를 베어 물고 상큼한 신맛을 짜릿하게 느낄 때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눈을 찡그리며 자신들의 이가 시리다고 했다. 난 그 신맛이 지금도 종종 혀끝에 남아 있는 듯 침이 고인다. 푸른빛의 가시만 남아 있는 가지에 눈꽃이 필 때쯤이면 내 발가락과 손가락들에서는 붉은 동상 꽃이 피어난다. 탱자나무의 눈꽃이 아름다울수록 나에게 피어난 동상 꽃도 만발하여 나를 괴롭혔다.
탱자나무는 자신의 사시사철 변하는 모습을 통하여 나를 포함한 모든 세상의 것들이 변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세상의 변화는 자연이라는 아름다운 친구들을 하나둘 내 주변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를 알려 준 탱자나무는, 아마도 우리의 이별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그 많던 탱자나무들이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나를 사랑스럽게 반겨주던 그 많던 친구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곳엔 정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궁상맞은 아파트가 하늘 높이 서 있다.
결혼하면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탱자가 노랗게 익으면 예쁜 바구니를 동네 가구 수만큼 사서 그득그득 탱자를 담아 이웃들에게 나눠 주리라 생각했었다. 결혼한 지 24년이 지났다. 주변 어디를 보아도 탱자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얄미운 아파트만이 즐비하게 서 있을 뿐, 이 겨울 다시금 탱자나무가 그리워진 것은 탱자가시에 눈꽃이 필 때 피어나던 붉은 동상 꽃 때문이다. 너무 가렵고 굼실거려 사혈 침으로 툭하고 찔렀다. 흘러내리는 검붉은 핏방울이 아프다기보다는 시원했다. 그리고 그리움이 핏방울처럼 솟구쳐 다가왔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쳤습니다.
하얀 탱자 꽃이 수줍게 만발하더니
향기로 온 동네를 감싸 안습니다.
파아란 탱자가 노오랗게 익어갈 때쯤
마음 속 사랑도 익어갑니다.
가시 없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날선 가시를 온 몸에 지닌 친구가 그리운 것은
아마도 너그럽게 열려 있는 마음 문 탓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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