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 김희자
바람이 남도 길을 열어 준다. 먹장구름이 물러나는 하늘에서 봄볕이 내려와 반짝인다. 분분하게 떨어진 붉은 꽃에 마음이 머문다. 섬과 육지를 이어 주는 외길 위에 정겨운 사람들의 웃음으로 가득하다. 일상에서 벗어나 길을 나선 사람들처럼 닻을 내린 선박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바닷길을 열어 주던 등대는 곤하게 잠들어 있다. 어디에서 음악이 흐르는가 싶더니 그 음악에 맞추어 물줄기가 춤을 춘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한 둘 음악 분수대 앞에 모여든다. 오동나무 꽃이 하늘에 걸렸다. 오동나무가 많았다는 작은 섬에는 뭉텅뭉텅 진 동백이 붉은 자국들로 난자하다. 겨울이 혹독할수록 시련이 클수록 더 붉게 타는 동백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내어 주는 길은 아름답다. 모든 길이 바다로 열린 죽포에서 유일하게 뭍으로 흐르는 길이 하나 있다. 사람들은 실오라기 같은 이 외길을 따라 바다를 건넌다. 먹장구름 한편에 고개를 내민 쪽빛 하늘이 우리네 인생도 그런 데 아니냐며 너울댄다.
길 위에는 날마다 벽에 걸어 두고 보아 온 달력 속 풍경이 펼쳐진다. 물이 빠져나간 갯벌에는 석화가 피고 바닷바람에 그을린 아낙이 고쟁이를 입고 그물을 뜯는다. 이런 풍경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내게 철 잃은 봄동은 노란 웃음을 짓는다. 길은 장비를 동원해야만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듯이 때로는 소리가 길을 내고 풍경이 내는 길 속으로 사람들이 들어간다. 그 풍경 소리가 사람들의 발길을 붙들기도 하고 사람이 길을 잉태하기도 한다.
나는 자유롭게 거니는 걸 좋아한다. 많은 연인들이 만들어 놓은 길 위에서 어떤 향기를 내려놓았는지 서성거린다. 길 위에 서면 애절한 서정시를 혀 위에 마음대로 굴릴 수 있고 정처 없는 소요에 심취할 수 있다. 아름다운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경치가 주는 신선함은 눈을 즐겁게 해 주고 잠시 머무는 쉼 속에서 기운을 얻는다. 낮게 드리운 구름이 바람이 되고 흔적 없이 사라지는 충경을 만나기도 한다. 쉬엄쉬엄 길을 가다 보면 풍경을 닮고 싶을 때가 있다. 마음은 산과 들을 닮고 사람은 마음을 닮는 것처럼.
땅 끝에 선 절집에 바람이 분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 뜬 풍경은 말이 없다. 금가루로 덧칠을 한 전각보다 처마에 귀걸이처럼 달린 풍경이 마음을 더 뺏는다. 바람은 불건만 풍경은 무심하다. 오랜 명상으로 길들여진 풍경의 여유일까. 깨달음의 경지일까. 그 고요의 한끝에서 나는 무언의 소리를 만난다. 묵언의 경지에 든 풍경이 인생도 저처럼 살라고 타이른다. 대웅전에서 새어 나온 향냄새가 바람에 날려 쪽빛 바다에 흩어진다. 바다는 깊어지고 하늘도 깊어진다. 풍경은 귀를 두드리지 못하지만 마음의 문은 활짝 열어준다. 이처럼 길에는 소리도 있고 말씀도 있다. 애달픈 꿈도 있고 그리움도 있다.
우리네 인생도 매양 그렇지 않을까. 소리를 낼 때는 소리를 내어야 하고 침묵할 때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부족한 것은 소리를 내지만 가득 차면 오히려 고요해진다. 새로운 물을 채우기 위해서는 가득 한 항아리를 비워야 하듯이 우리 삶에도 여백이 필요하다. 털고 털어도 밤하늘의 별처럼 돋아나는 것이 욕심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그리움을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소리를 내며 살았는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저 풍경처럼 침묵을 통해 나 자신을 비워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도 길이다. 인생에 주어지는 많은 결과들은 아쉬운 순간들을 남긴다. 하지만 시간은 그저 길처럼 흐를 뿐이다. 지난날 잃은 것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인생이란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살면서 조금씩 배우고 느껴 가는 것이다. 사람마다 걸어온 길은 다르다. 어떤 길도 어머니가 걸어간 길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으며 아버지의 발자국이 난 길처럼 숭고하고 가파른 길은 없다. 각자의 길에 새겨진 인생의 무늬처럼 길 위에는 사무치는 인생의 노래가 있다.
길에는 좁은 길이 있고 넓은 길이 있으며 반듯한 길이 있는가 하면 구부러진 길도 있다. 그중에서 나는 구부러진 길을 좋아한다. 들국화 향기를 따라 구부러진 길 끝에 서면 암자로 이어지는 길이 나타나기도 하고 세속과는 다른 길이 펼쳐지기도 한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구부러진 길에는 들꽃도 많이 피고 볕도 많이 든다.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어 넉넉하다. 그래서 구부저린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위을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부저린 삶이 더 값지다. 구부저린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둥글둥글한 사람이 나는 좋다.
길은 사회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서사시가 될 수도 있고 서정시가 될 수도 있다. 로마로 통하는 돌을 깐 길들이나 미국 대륙을 그물처럼 누비고 있는 고속도로에서 크나큰 서사시를 읽을 수 있다면 미루나무에 그늘진 한국의 논길 혹은 산길너머 이웃 마을로 통하는 한국의 산길에서 따뜻한 서정시를 들을 수 있다. 신작로는 소읍에서 저잣거리가 있는 큰 읍내로 나가는 길이며 골목길은 집과 집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얼마 전, 매스컴을 통해서 T도시로 예술가들이 모여든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T도시는 많은 예술가들의 고향이며 사랑이 머물고 바다가 풍경이 된 곳이다. 사랑과 풍경이 있는 그곳에 예술가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터를 잡는다고 한다. 풍경이 있는 곳에는 길이 있고 길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모여든다. 그래서 절로 문화가 꽃을 피우고 하나의 공동체가 되기도 한다.
돌아보면 모두가 길이었다. 수많은 길과 고개를 넘어 나는 지금도 길 위에 서 있다. 아스팙트 같은 탄탄대로도 있었고 절벽 같던 길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뻐꾸기 울음소리처럼 애달픈 길도 있고 다정했던 사람과 걸었던 오솔길도 있다. 기억 속에서 까맣게 지워 버리고 싶은 길도 있다. 길은 풍경이고 추억이며 희망이다. 그 길 위에서 살아온 날들, 이제는 마음속의 길을 헤아려야 할 시간이 되어 버린 지금 삶의 질서를 관조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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