똬리 / 장미숙
동그란 중심이 참 옹골지게 생겼다. 그 작은 몸집으로 온 세상을 떠받쳤으니 어찌 야무지지 않겠는가. 이지러지지도, 모나지도 않은 동글동글 어여쁜 모양새는 맘씨 좋은 시골 아낙 같기도 하다. 소박하지만 단단하기는 또 어떤가. 무엇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부드럽다. 부드러움 속에 감춰진 유연함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힘이다.
융통성은 만물을 소통하게 하는 통로다. 완고하지 않으면서 품어주는 아름다움이 있었기에 수많은 생이 그 안에서 시름을 녹이고 위안을 얻었으리라. 그 무엇도 대신해줄 수 없었던 철저한 외로움과 고달픈 육신을 스스로 위무하며 인고의 탑을 쌓은 수많은 여인네의 한숨이 배어있다.
촘촘한 결 사이사이에 쌓인 설움이 단단한 응어리가 되어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만들었다. 그 중심은 한 사람의 몸을 바로 세우고, 가까우면서도 때로는 가장 먼 가족의 마음을 잡아주고, 가문(家門)까지 일으켜 세워 한나라를 굳건히 하는데도 한몫을 했던 것이다. 중심이란 모든 것의 가운데가 아니던가. 중심이 바로 서지 않으면 쉬이 흔들리고 흔들리면 무너지기에 십상이다. 그러니 중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나름대로 역할이 있다. 크든 작든, 잘났든 못났든, 생명이 있든 없든 각자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다면 의미라는 것은 어떤 기준을 가졌는지 자못 궁금해지기도 한다. 인간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사물은 사람에게 좀 더 이롭거나, 좀 더 친근하거나, 좀 더 안전할 때 그 의미가 더해질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의미라는 것도 보는 이들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라고 하면 의미 또한 정해졌다기보다는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친정 헛간 모퉁이에 있던 오래된 상자 안에 멈추어버린 시간이 들어 있었다. 우연히 발견한 똬리에서 나는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동그란 머리에 얹어 물건을 이고 나르는데 편리하도록 만들어진 똬리의 작은 원이 우주처럼 커다랗게 다가왔다. 그건 마치 태초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짚으로 엮어 만든 작은 똬리가 가슴속으로 가득 들어온 건 요즘 보기 힘들어진 물건이어서만은 아니었다. 그 속에 내포된 존재의 의미가 거대한 파도가 되어 순식간에 나를 과거의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비어 있지만 많은 이야기를 빼곡하게 담고 있는 중심 속에는 내 어머니의 동그란 삶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 이모, 고모, 외숙모, 언니 등 옛 시대를 산 여인네들의 삶도 숨어 있었다. 또한, 찰박거리는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를 종종거리며 다녔던 어릴 적 내 모습도 아른거렸다. 요즘은 민속박물관에 가야 만날 수 있는 똬리에 대한 기억이 촘촘하게 살아나기 시작했을 때 똬리는 하나의 커다란 중심이 되었다.
요즘처럼 이동기구가 없던 예전에는 물건을 이고, 지고, 들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똬리는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닐 때 중심을 잡아주고 완충 역할을 해준 생활도구였다. 아무리 크고 무거운 것이라도 힘을 골고루 분산시켜 주었다. 덕분에 흔들림 없이 목적지까지 운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똬리를 단순한 생활도구라고 정의하기엔 그 작은 몸 안에 담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 무겁다. 여인들의 애환을 간작하고 있어 그 존재의 의미가 애달픔의 대명사처럼 시리고 아프다. 똬리는 어떤 시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강인한 여인들의 삶을 대변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활이 어려울수록 삶은 흔들리게 마련이다. 삶이란 희로애락이 서로 교차한다고 하지만, 희락(喜樂)보다 노애(怒哀)가 더 많은 게 보편적이다. 특히 어려운 시기를 살았던 여인들의 삶은 고단함과 슬픔의 나날이었다. 가난과 시집살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굴레였고, 거기에 병치레를 하는 가족이라도 있으면 깊은 나락으로 순식간에 떨어지는 게 여인들의 운명이었다.
어머니의 삶도 그랬다. 순하고 손끝이 야무졌던 어머니는 소년가장이던 아버지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어머니는 쉬지 않고 일을 했지만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아버지에게는 작은집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보모님이나 다름없었다. 작은집 식구까지 한집에서 살았으니 어머니의 생활이 어땠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종갓집 종부인데도 대를 이를 아들을 일찍 낳지 못한 건 모두 어머니 탓이었고, 그나마 삼 년 만에 낳은 자식이 딸이었으니 그 실망이 오죽했을까. 줄줄이 딸 셋을 낳는 동안 설움은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 눈물이 되고 한숨이 되었다. 눈물마저도 밖으로 흘릴 수 없어 어머니는 일찌감치 가슴에 깊은 샘을 팠노라 했다. 그 샘이 종래에는 한의 역사가 되어 자식들의 가슴까지 적시곤 했다.
종갓집 종부의 삶은 고단했고 어머니의 머리에 얹힌 똬리는 늘 어머니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눈밭으로, 샘으로, 장으로 이고 날라야 했던 물건은 얼마나 많았을까. 흔들리고 위태로웠던 마음을 잡아야 했던 날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베를 짜느라 잠을 못 자 눈알이 흐릿해질 때면 행여 물동이를 깰까 봐 똬리에 온 힘을 모았노라고 했다. 물동이보다 못한 당신의 운명을 탓하며 똬리 끈을 문 입술이 부르트도록 어머니는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콩쥐의 밑 빠진 독처럼 차오르지 않는 물두멍을 원망하며 샘으로 종종걸음을 쳤을 어머니에게 똬리는 고된 삶을 고스란히 받쳐준 상징 같은 것이었다.
고통의 순간들이 때로는 삶을 지탱해주는 약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어머니는 몸소 보여 주었다. 아버지마저 병으로 어머니의 짐이 되어 버렸을 때 어머니는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신 듯 똬리 위에 온갖 것들을 올렸다. 어머니가 머리에서 똬리를 내려놓은 게 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머니는 영원히 당신의 생에서 똬리를 내려놓지 못하셨다. 언젠가 어머니 머리에 파마를 해드리다가 맞닥뜨린 동그란 상처는 세월이 어머니께 바친 핏빛 훈장이었다. 그날 이후 어머니의 훈장은 또한 내 삶의 좌우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자칫 모든 것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었을 물리적인 힘과의 균형을 똬리가 잡아줬듯이, 위태롭게 흔들리던 집안을 바로잡은 건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이었다. 어머니가 중심을 잃지 않고 묵묵히 한길을 걸어온 덕분에 모든 게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말보다 몸으로 보여준 어머니의 철학에는 계산보다 덤이 먼저였고, 채움보다 비움이 먼저였다.
똬리는 이제 시간을 움켜쥐고 어둠 속으로 침잠할 것이다. 이미 세상은 똬리의 존재와 상관없이 변했고 또, 변해갈 것이기에…. 하지만 누군가는 기억하리, 변한다는 건 겉으로 드러난 사물의 모습일 뿐, 그 근본은 깊은 침묵 속에 가라앉아 만물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을…. 태우면 한 줌 재에 불과할 똬리가 오늘 이 시간, 내게는 왕관처럼 빛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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