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빚은 흙빛 숨결 / 김민영
넓은 뜰에 포개져 있는 옹기들이 어머니의 굽은 등만큼이나 선을 그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볕 좋은 날, 어머니는 장독 뚜껑을 열어 손가락으로 휘저어 장맛을 한 번 보고 햇볕이 담기게 열어 두었다. 큰 장 단지들 밑으로 나란히 줄 세워져 있는 작은 단지 뚜껑을 열어 하얀 천위로 햇살이 담기게 했다. 음력날짜에 맞추어 장을 담고 하늘의 기운을 당겨 맛이 익어 갈 때를 기다린다. 맑은 장은 찬 기운과 따뜻한 기운을 번갈아 받으며 색깔을 우려내고 그 맛을 더해 간다.
어머니의 가슴은 다 비워낸 옹기처럼 이제는 긴 시간을 자식들 오기만 오롯이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 뵌지가 서너 달이 되어 간다. 전화로 들리는 목소리는 끝없는 그리움이 묻어 있다. 하루하루 벌어야 하는 형편에 짬을 내어 어머니에게 다녀오려고 마음먹어 보지만, 자식을 잠깐 보고 돌려보내면 어머니 마음도 서운할 것이고, 멀리 가서 곧바로 돌아 나오는 나도 서운할 것이라 시간을 내려고 기다려 봐도 여유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막내와 옹기체험학습을 나서는 김에 어머니께 가서 자고 오려 한다.
어머니는 연세가 아흔에 가까워지자 급하게 병원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혹여 이 길이 마지막 어머니 모습이 될지 모른다는 마음에 자식들이 한꺼번에 모였다가, 기울여 옹기 속 비워내듯 가고 나면 햇살이 들지 않는 구석진 방에서 어머니는 혼자 계신다.
어지럼증이 생기면 계단을 내려가지 못하여 몇몇 날을 문 한 번 열지 않고, 텔레비전을 벗하며 방에만 계시는 것이다. 우리 집은 아직 아이들이 어리니, 아이들보고 싶다는 핑계로 한 번씩 오셨는데, 이 자식 저 자식 서러 마음이 다르고 장거리 이동에 혹여 잘못될까. 이제는 그 어디도 가지 않고 집에만 계시려 한다. 어머니가 위급한 상황이 될 때 자식들은 급한 마음을 가지고 왔다 갔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한 후 특별한 날이 아니면 어지간해서 어머니를 찾아뵙지 않고 있다.
어머니 입 마름을 적셔줄 배를 몇 덩이 사서 찾아뵈었다. "긴긴 밤을 정든 님하고 짧게 보낸다더니 우리 막내랑 함께 자니 오늘 밤은 짧아서 좋기를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라고 말씀을 하시며 내 손을 만져 보기도 하고, 뺨을 만져 보기도 하다가 "방안이 설렁하다." 말하시며 힘없는 손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니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자고 일어나도 깜깜한 밤이고 또 자고 일어나도 깜깜했어. 낮이나 밤이나 지겹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어찌나 느그들이 보고 싶던지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다가도 자식 없는 사람도 사는데, 매일같이 전화하고 또 찾아올 날이 있을 거라 마음을 다지면서 참았다." 라는 어머니 말씀에 '얼마나 고독하고 말벗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에 미치자 차오르는 아픔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어머니 집에서 가까이 있는 자식이 가끔은 찾아와서 돌보고 있지만, 또 다른 자식들을 보고 싶어 한다는 생각을 안이하게 여기는 사이 어머니는 마음의 병까지 깊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자식을 셋 낳아 봐야 부모님 속을 안다고 하더니 자식 셋 낳고 마흔을 넘기고부터 더는 어머니께 속 썩이지 않고 살아야지 하는 마음을 가졌는데 또 불효한 것 같았다. 하룻밤만 자고와도 애가 탈 만큼 그리움이 병이 되지는 않았을 것인데 먹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연로한 어머니 찾아뵙기를 내일 내일 하면서 세월을 보낸 나 자신이 한없이 탓해졌다. 지난날, 나의 생활이 힘든 것조차 어머니 탓으로 돌린 모든 것들이 죄스럽고 이대로 먼 길 떠나고 나면 헤아릴 수 없이 저질러 놓은 불효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가슴이 멍울 되어 차올랐다. 어머니는 손자까지 본 큰 자식들은 웬만큼 살고 있어 잊어버리는데 아직도 올망졸망한 자식들이 있는 막내를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항상 기다리고 애달파하는 것 같았다. 돈 아끼지 말고 입에 맞는 것 사드시라고 용돈을 조금 드렸더니, 주머니에 꼬깃꼬깃 넣어두었던 큰 자식들이 준 돈과 합하여 아무 말 하지 말고 받아가라면서 손안에 꼭 쥐여 주었다. "아이들이 한정 없이 먹을 텐데 먹고 싶어 할 때마다 다는 못 사주어도 이 돈으로 하나씩 사 주라."라는 말씀 잊지 않았다. 자식이 잘 살아가는 것도 효도인데, 그 돈을 뿌리칠 만큼 형편이 되지 않는 나의 삶에 어머니는 아직도 퍼주기만 하는 큰 항아리 같았다.
막내가 잠결에 엄마를 찾더니 품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나는 막내를 한 번 안아 주고는 "다 큰 놈이 아직도 얼라 짓을 하노'하며 밀쳐 내어놓고 어머니의 작아진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옛날에 맡았던 좋은 엄마 냄새가 아직도 난다고 하니 어머니는 목욕을 제대로 하지 못해 냄새가 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오래전에 맡았던 엄마 냄새였는데 제대로 씻지 못해 자식한테 냄새를 풍기나 싶어 무안하게 생각을 하시는 듯했다. 자고 일어나면 목욕탕에 가서 어머니의 굽은 등을 따뜻한 물로 씻어 드려야겠다. 어머니의 거친 숨결이 잔잔한 가슴을 여울질 하며 다가오는 깊은 밤, 맑은 장맛이 달콤하게 익어가는 것처럼 어둠이 가실 때까지 어머니 낮은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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