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푸른 봄 / 한경선
사람들은 벚꽃에 홀려 들떠 있었다. 꽃향기 대신 날리는 지린 냄새도 풍선처럼 떠오른 흥분을 끌어내리지 못했다. 하필 동물원에 핀 벚꽃을 보러 갔으니 사육장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원숭이 우리 앞에 모여 있었다. 생김새가 다른 원숭이 몇 마리가 잎도 없이 댕강댕강 자른 나무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했다. 어떤 놈은 오도카니 앉아 사람을 구경하고 어떤 놈은 무엇을 달라는 듯 손을 펴 보이기도 했다. 어릴 때처럼 그 모습이 마냥 재미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마른 바람까지 불었다. 오래 바라볼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원숭이 우리 모퉁이를 막 돌아 나올 때였다.
마른 나뭇가지조차 없는 사방 시멘트 벽, 시멘트 바닥의 어둑한 공간에 침팬지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느닷없이 나타나 검은 점처럼 꼭 찍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제 막 어린 티를 벗었는지 몸집이 작았다. 순간 흠칫했다. 정물처럼 앉아있는 녀석에게서 검푸른 파장이 진해져왔다. 그곳으로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나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침팬지와 그 침팬지를 보고 있는 나뿐이었다. 그 앞에서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털 속에 보이는 한쪽 눈이 안개 낀 호수 속인 듯, 그늘 짙은 정글 속인 듯 깊었다. 저를 보는 내 눈도 마주치지 않고 생각 너머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이제껏 그처럼 아득한 눈을 본 적이 없다. 높은 곳을 향한 아득함이 아니라 바닥으로 바닥으로 내려가는 아득함이다. 더 있어야 하나 지나가야 하나, 짧은 순간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다가 가만히 그곳을 나왔다. 시간이 흘러도 어딘가 숨어 있던 침팬지의 눈이 불쑥불쑥 내 안에서 떠오르곤 했다.
카프카의 단편 소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각색한 연극 속의 원숭이를 보았다. 황금 해안에 살던 원숭이가 무리와 함께 물 먹으러 갔다가 사냥 원정대 총에 맞았다. 증기선 중간 갑판의 우리에서 깨어난 원숭이는 있는 힘을 다해도 넓혀질 수 없는 곳, 출구가 없는 곳에 갇혀 있음을 알았다. 보이지 앉는 어떤 출구를 찾아야 했다.
사람처럼 되면 쇠창살이 열릴 것이라 생각한 원숭이는 침을 뱉고, 술 마시는 연습을 하며 사람 흉내를 냈다. 그리고 처절한 노력을 하여 사람처럼 살게 되었다. 밤마다 하는 공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연회, 학술모임을 마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면 반쯤 조련된 조그마한 침팬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처럼 살게 된 원숭이는 자기는 갇혀 있던 우리를 벗어났다며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을 조롱했다.
‘땅을 딛고 있는 이들의 발뒤꿈치를 간질이는 것은 무엇인가’ 선문답 같은 물음을 던지던 그 원숭이가 동물원 우리로 돌아왔다. 인간 흉내를 내다가 지쳐서 기억을 되찾아가며 황금해안의 정글로 가는 출구를 다시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가에서 밖을 내다본다. 높은 건물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 누군가 감시하며 막는 것도 아니고 자유로운 두 발도 있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보이지 않는 틀 속에 주저앉아 있다. 밖에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 소리가 들리고 오고가는 자동차 소리도 들린다. 잎이 피고 새가 난다.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마음껏 들락거린다. 창을 사이에 둔 풍경 앞에서 나는 어느 섬에 홀로 떨어진 것처럼 아득하다.
건물 사이로 빼꼼 하늘이 열려 있다. 그 사이로 숨구멍이 있을 것 같아 숨을 들이마신다. 눈길이 닿는 하늘 끝에 예배당 십자가가 보이고 그 앞에서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간판이 보인다. 낡은 예배당 첨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현대식 건물 이마에 얹힌 영화관 간판이 환하게 땅을 비춘다. 그렇지만 첨탑 끝에도 간판 앞에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내 안에 있던 침팬지의 눈이 부표처럼 떠오른다.
연극 속의 원숭이와 동물원에서 보았던 침팬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 것은 순전히 창밖에 가득한 봄빛 때문이다.
낡은 아파트 앞에 햇살 부스러기로 비둘기 서너 마리를 먹여 키우는 튀밥장수가 있다. 봉지 속에 든 튀밥이 선하품을 하고 졸음이 매달린 튀밥기계는 제자리에서 맴을 돈다. 아지랑이 속에서 ‘뻥-.’ 소리에 놀란 할머니 발끝으로 웃음이 굴러 길을 낸다. 새가 날아오른 하늘가에 비행운이 길을 낸다.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 입 속에 쑥 올라온 이 두 쪽이 해맑다. 늦잠 자던 벚꽃 튀밥이 툭툭 터진다. 깊고 푸른 봄이 등불을 켜들었다. 저기쯤 침팬지가 꿈꾸는 출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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