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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불돌 / 조이섭

불돌 / 조이섭


 

  아이들이 떼 지어 뛰놀고 있었다. 판자촌의 좁고 가파른 골목길은 온통 아이들의 소리로 가득 찼다. 가난한 동네에 아이들은 왜 그리 많았던지. 골목 구석구석에서 구슬치기며 딱지치기, 말타기를 하느라 동네가 떠나갈 듯했다. 어른들도 그런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낮 동안에는 한 푼이라도 벌려고 모두 집을 비워 시끄럽다고 야단칠 어른이 없었다.

  어느 날 높은 학년 형들이 화랑 관창을 연극으로 해보자고 했다. 종이로 왕관을 만들고, 나무로 칼이며 창이랑 활 같은 무기도 만들었다. 집에 있는 보자기를 가지고 나와 어깨에 턱 걸치고 묶기만 해도 훌륭한 망토가 되었다.

  우리는 대본을 만든 큰형이 시키는 대로 제각기 맡은 역할을 부지런히 연습했다. 며칠 동안은 연극연습 하느라 온 골목이 조용했다. 연습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포스터를 그려 골목 벽에다 붙였다. 초대장을 만들어 동네 여자애들한테도 돌렸다.

연극을 하는 날이었다. 그나마 손바닥만한 마당이 있는 집에다 정성 들여 무대를 꾸몄다. 시간이 되자, 마당에는 여자애들과 조무래기 관객들로 가득 찼다. 연극을 막 시작하려는데, 여자아이 하나가 앉은 자세로 한쪽 손으로 땅을 짚고 엉덩이를 질질 끌면서 힘겹게 다가왔다. 긴 머리칼이 땀 범벅된 얼굴에 이리저리 엉겨 붙어 있었다. 옆에 있던 동무가 외쳤다. “야 너는 가! 오지 마!”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 “!” 하고 소리쳤다.

큰형이 괜찮다면서 오라고 손짓했다. 여자애가 다가오자 다른 아이들은 앉은 자리에서 슬금슬금 피하며 자리를 내주었다. 큰형이 여자애를 부축해서 제일 앞자리에 앉히고 초대장을 꼭 쥐고 있는 손을 번쩍 들어 흔들며 말했다. “이 아이도 손님이다. 불편한 몸으로 여기까지 구경하러 왔으니 함께 봐야지.” 여자애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지만, 금세 얼굴을 들고 군빗질로 엉클어진 머리 매무시를 고치며 환하게 웃었다.

여자애는 몇 달 전에 오빠와 단둘이 우리 동네로 이사 왔다. 오빠라 해도 열 일고여덟의 소년가장이었다. 그 집은 골목에서도 가장 허름한 판잣집이었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궁이만 있는 부엌과 손바닥만 한 마루가 딸린 방이 하나 있는 집이었다. 마루에는 골목 쪽으로 난 들창이 있었다.

  여자애는 어찌 된 영문인지 일어서지 못하는 장애를 앓고 있었다. 그래서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았다. 벌어진 판자 틈이나 들창을 올려 골목을 뛰어다니는 우리를 훔쳐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때로는 밖으로 나와서 간절한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곤 했다. 그 눈길은 함께 놀아달라는 외침인 줄 알았으면서도 나는 비겁하게 그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오히려 그 아이를 놀리는 데 힘을 보탰다.

  한번은 동무 몇 명과 여자애 집 앞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문밖으로 나와서 우리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던 중에 누군가 그 아이를 발견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앉은뱅이 가시나 나왔다.” 우리는 말리기는커녕 더욱 크게 소리쳤다. “야 들어가, 병신아!” 야윈 얼굴에 눈만 커다란 여자애는 아무 말대꾸도 못 했다. 두 팔을 짚고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나면서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나는 기가 살아 더 큰 소리로 놀렸다.

이때, 비탈길 위에서 누군가 뛰어 내려오더니 여자애 머리채를 사납게 틀어쥐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빠였다. 우리는 모두 놀라서 도망을 갔다. 집안에서 고함과 함께 여자애를 때리는 소리, 울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왜 밖에 나가지 말라는 오빠 말을 듣지 않고 놀림을 받느냐. 이제 문을 잠가 버릴 거야.”

  잠시 후 오빠가 씩씩거리며 나오더니 자물통을 채우고 다시 비탈 너머로 가 버렸다. 혼자 남은 여자애의 흐느끼는 소리가 오랫동안 판자 틈으로 새어 나왔다. 그날 이후로 그 집 문에는 커다란 자물통이 계속 채워져 있었다. 여자애는 판자 틈으로 밖을 내다보지 않았고 들창도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 동네 아이들이 연극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아이는 불편한 몸으로 기다시피 오기엔 꽤 멀리 떨어진 마당까지 온 것이었다. 여자애는 연극 구경하는 내내 흙 묻은 손바닥으로 손뼉을 치고 까르르 웃으며 즐거워했다.

  여자애는 다음날부터 우리가 골목에서 노는 것을 판자 틈으로 다시 지켜보기 시작했다. 우리도 거리낌 없이 구슬치기나 장기 알까기를 하며 놀았다. 며칠이 지나자 여자애가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놀리지 않고 함께 어울려 놀았다. 오빠가 잠가 둔 자물통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여자애가 판자문을 두드리면, 밖에 있던 우리가 문 아래쪽을 들어 올려 벌어지는 사이로 자그마한 몸을 쏘옥 빼고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었다.

  어느 날, 오빠가 우리와 함께 밖에서 노는 동생을 보았다. 오빠는 이번에도 여자애 손을 낚아채서 거칠게 끌고 갔지만, 고함이나 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음 날부터 출입문에는 자물통이 사라졌다. 여자애는 골목에 우리가 보이면 저 혼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전에 없던 빨간 리본을 머리에 달고 있었다. 오빠가 사 주었다고 자랑했다

여자애와 함께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되기 전에 이사하였기 때문이었다오빠가 손수레에 얼마 되지 않는 이삿짐과 함께 동생을 태우고 비탈길을 올라갔다. 어쩌다 혼자서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된 나는 손수레를 밀어줄 생각도 못 한 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여자애가 먼저 손을 내밀어 무엇인가를 건네주었다. 골목에 흔히 굴러다니는 넙데데한 청석 조각이었다. 갇힌 집 안에서 혼자 얼마나 만지고 튀기며 놀았던지 까만 바둑돌처럼 반질반질했다.

나는 여자애가 주고 간 돌을 평생 가슴에 뭉근하게 품고 살았다. 그 돌은 내가 남의 약점을 헤집으려 들거나, 패거리를 만들려고 할 때마다 일렁이는 이기(利己)와 교만의 불꽃을 눌러주던 불돌이었다. 연극 마당에서 손뼉 치고 즐거워하던 그 여자애의 이름과 얼굴마저 가물가물하지만, 불돌은 약한 사람에게 먼저 배려하는 작은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나를 다독여주고 있다.

여자애가 아픈 것만 빼고 우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여길 줄 몰랐던 어릴 적 상처가 여태껏 아릿하다.

 

불돌: 화로의 불꽃이 이는 것을 막고, 불이 쉬 사위지 않도록 눌러놓는 조그만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