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광(狂) / 강경애
연초록이 서서히 산야를 물들이고 있다. 이때쯤부터 나의 내부는 들끓기 시작한다. 딱히 봄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초록을 열애하고 있는 나는 정신을 한군데 놔두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열애와 혼돈이 날개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누구든 좋아하는 색이 있어 그 색깔에 빠진다고 할 때, 나는 초록 광(狂)이다. 초록으로 채색된 사물을 보면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가슴이 마구 두근거린다. 마치 보고 싶어 애태우던 영화를 보거나, 읽고 싶었던 책을 손에 넣거나, 원하던 곳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할 때의 느낌처럼.
그러기에 내 외출복의 절반은 녹색이며 그와 비슷한 푸르뎅뎅한 색상들이다. 나는 이 색깔로 나를 감싸고 그 안에 웅크린 채 물들어 있다. 물론 다른 색의 옷들도 있지만, 그것들은 녹색의 아웃사이드일 뿐이다.
이렇듯 초록은 내게 있어서 무조건적이기에 길을 걷다가도 쇼윈도에 녹색을 입힌 그 어떤 것이 눈에 뜨이면 내 가슴은 요동치고 숨이 막히는 듯해서 그냥 지나치지를 못한다. 매번 그렇지는 않지만, 그때마다 그 상품 앞에서 머뭇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바라보다가 구매를 하거나 아니면 다음을 기약하고 발길을 돌린다.
그러고 보면 나는 초록으로 감싸인 봄이나 여름을 실제로는 그다지 열애하지도 않으면서 그 계절의 색을 몸에 걸치고 소유하며 설레임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색깔들은 저마다 개성이 강하고 특징이 확연히 구분된다. 그 중에서도 초록은 만물의 생성을 의미하기에 생명이나 자연을 연상하게 하지만, 니콜라 푸생은 녹색은 이브를 홀린 뱀의 색이라고 했다. 그러기에 녹색의 사악한 마음에 의해 사람들이 죄악을 맛보게 되고, 그 순간부터 세상에 존재하던 평정과 평화는 깨지면서 시샘과 질투, 이기적인 마음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의 색깔 역시 초록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초록에는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된다. 얼핏 느끼기에 초록은 다른 색보다는 평화롭고 안정적인 것 같지만 복선을 품고 있는 것이다.
초록색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초록 독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일설이 있다. 그는 초록색을 너무 좋아해서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초록색 페인트로 칠해 놓았다. 그로 인해 그 초록색 페인트가 섬의 습한 기후에 차츰 용해되어 독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초록이 생성을 의미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생명과 소멸을 동시에 아우르는 것이다.
내가 광적으로 초록에 빠지는 것은 그 어떤 무의식이 나를 그 색깔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색과 인간의 함수관계는 묘하기 이를 데 없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은 우연이나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의 언어와 사고에 깊이 뿌리 내린 경험의 산물이라고 누군가 말했듯이, 색깔과 감정의 관계 역시 심리학적으로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흐가 광적으로 노란색을 선호했듯이, 색체의 화가라고 불리는 모네는 초록색을 사랑하여 정원을 직접 가꾸며 초록의 화음을 자랑하는 <수련연못>을 비롯하여 수련 연작시리즈를 제작했다. 이렇듯 화가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색을 화폭에 옮기며 자신의 이미지와 개성을 드러낸다.
북이 고향인 한 원로 화가는 어린 시적 바닷가에서 자라던 그 기억을 잊지 못해 몇 십 년 동안 바다 속이나 하얀 풍경만을 그린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은 늘 푸른 바다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다른 색은 부분적인 색만 된 뿐이다.
또 회색 톤으로 캔버스를 채우는 화가도 있다. 그 회색 톤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알지 못할 고독이 안개비처럼 보는 이에게도 스며든다. 그는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했던 해외파지만, 그 역시도 북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이다. 몇 년 전에 레테의 강을 건너간 그는, 지금쯤은 음울한 회색의 이미지를 벗어나 따사로운 색깔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초록광인 내가 초록으로 내 인생을 색칠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건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고 가슴속에 간직하고 살라는 화두가 아닐까 생각한다. 대지에 맨 처음에 입성하는 색이 초록이듯이 초심을 잊지 말고, 현실에 좌절하지 말고 아직 풀어내지 못한 꿈들을 늦게라도 이루기 위해 노력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꿈이 있다는 것은 열리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렇듯 초록은 아직 숙달이 덜 된 여린 마음이나 행동들을 나타내기도 하기에 그 색이 느끼게 하는 견고한 아름다움은 없지만 생명력을 용솟음치게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폴레옹처럼 초록의 독에 중독되어 미스터리한 죽음을 맞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내내 광으로 남을 것이다.
이즈음은 세상의 모든 색깔들이 총출동하여 도시는 점점 현란해진다. 하지만 색의 기초는 생성을 의미하는 초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다시 인식하며, 봄 속에서 안개처럼 퍼지는 초록의 향기에 젖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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