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랑대 / 장미숙
솜털 같은 구름이 산등성이에 걸려 있다. 하얀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말갛다. 태고의 색처럼, 순수로 빚어놓은 백자의 색감 같은 구름을 하늘이 감싸고 있다. 향기로운 바람 한 줄기가 가슴을 열어젖히는 이런 날은 문득 고향 집 마당에 있는 바지랑대가 떠오른다.
감나무의 푸른 잎이 더욱 짙어지는 계절이면 담벼락에 호박들이 속을 채우느라 호흡이 가빠졌다. 부지런히 햇살을 먹고 동글동글 영글어가던 호박의 여유처럼 빨랫줄에 널린 빨래도 한가로이 나부꼈다. 땅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바지랑대 위에서는 향기로운 바람이 그네를 탔다.
고즈넉한 어느 한 계절, 눈처럼 흰 이불 홑청이 빨랫줄에서 나부끼는 모습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운 게 있을까. 고향을 생각하고 유년을 그리워하다 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그중 빠질 수 없는 건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과 바지랑대다. 그 기억은 생생해서 매 순간 마음속에 바지랑대 하나 세워두고 싶은 열망에 부채질을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어느 집이건 빨랫줄에 빨래가 널려 있게 마련이다. 친숙하면서도 정답고 평화로운 빨랫줄, 그 빨랫줄의 평행을 유지하기 위해 꼿꼿하게 서 있는 바지랑대는 주위 풍경의 중심을 이룬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빨랫줄이 없으면 뭔가 빠진 듯 허전하다. 빨랫줄의 빨래는 우리 삶의 흔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빨랫줄이 있고, 지붕보다 놓은 바지랑대가 서 있는 집은 정겹고 아늑하게 느껴진다.
바지랑대는 세상 모든 어머니를 닮았다. 자신의 몸에 의지하고 있는 빨랫줄의 무게는 균형을 잡지 않고서는 버텨내지 못할 만큼 버겁다. 땅과 하늘을 수직으로 연결하고 있는 모습은 가족의 소망을 염원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짐 없이 평형을 이루는 수평은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 안에는 가족의 평화와 질서,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
비바람에 휩쓸리고 추위에 살이 깎이고 더위에 온몸이 녹아내리도 뚝기로 버텨낸다. 그건 내어줌의 삶이기에 가능하다. 늘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어머니들의 삶이 바지랑대를 닮은 이유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서 자식들을 도닥거리고 안아주는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꺾이지 않는 강한 의지가 향기로 피어난다.
어린 시절, 나는 우물에서 빨래하는 어머니의 등을 바라본 적이 많다. 툇마루에 턱을 괴고 앉아 있으면 우물에 쪼그려 앉아 빨래하던 어머니의 들이 책 속의 그림처럼 다가왔다. 가만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마음은 평온해졌다. 하얀 수건을 머리에 쓰고 어머니는 맨손으로 빨래를 하셨다. 울퉁불퉁한 돌 위에서 열심히 빨래하던 어머니의 등은 일정한 리듬에 맞춰 오르락내리락했다. 옆에 있던 빨랫줄의 바지랑대도 바람에 맞춰 리듬을 탔다. 묘한 조화였다.
빨래하는 어머니의 등과 바지랑대의 흔들림은 어린 내 마음에 물결처럼 흘러들어와 음악이 되고 그림이 되었다. 빨래를 다 한 어머니는 손들에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빨래를 꼭 짰다. 꼬깃꼬깃한 옷은 허공의 등에 다림질을 한 후 빨랫줄에 가지런히 널렸다. 자식들의 축축하고 눅눅한 마음을 말리듯 어머니는 빨래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펼쳐놓고 흐뭇해했다. 빨래를 널고 나면 어머니는 맨 마지막으로 바지랑대를 반듯하게 세웠다. 마치 당신의 삶을 일으켜 세우고 스스로를 다독이듯 그 모습에는 어떤 경건함까지 있었다.
해사한 날이면 빨래들은 금세 말라 보송보송해졌다. 맑은 바람과 따뜻한 햇볕이 스며든 빨래에서 우리는 어머니의 진한 땀 냄새를 맡았다. 가난하고 억척같이 살아야 했던 시절에도 빨랫줄에서 막 걷은 빨래처럼 식지 않은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는 수없이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정작 우리의 바지랑대가 되어 주었어야 했을 아버지는 병으로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의 한편으로 물러나 있었다.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 든든하고 믿음직한 가장 대신 부끄러운 이름의 아버지였다. 웃음보다 눈물부터 나오게 한 아버지는 기쁨과 슬픔을 기족과 나누지 못했다.
당연히 어머니의 등은 아버지가 짊어져야 할 몫까지 얹혀 한없이 작아졌다. 그 작은 등으로 어머니는 슬픔과 절망을 씻어 빨랫줄에 널었다. 오 남매의 슬픔이 널린 빨랫줄은 어머니의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였다. 가녀린 바지랑대 하나만으로 버티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어머니는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자식들은 목숨보다 소중한 삶의 의미였음을 내가 자식을 키우며 알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어머니의 어깨가 가벼워지는 대신 자식들은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나갔다.
고향 집에는 지금도 마당을 가로질러 처마와 감나무 사이에 빨랫줄이 걸려 있다. 빨랫줄을 지탱하고 있는 바지랑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키 큰 대나무로 의연하게 서 있다. 하지만 예전보다 바지랑대가 힘겨워 보이진 않는다. 어깨가 거벼워진 바지랑대에는 잠자리가 와서 낮잠을 자기도 하고, 구름이 쉬어가기도 한다. 비가 온 뒤에는 고인 물에 자맥질도 하고 달 밝은 밤이면 달빛에 푹 싸여 낭만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어머니가 건너온 세월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나는 바지랑대를 가슴에 품어 본다. 나는 결코 어머니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다다를 수 없는 먼 곳에 어머니는 계신 것 같다. 돌봐야 할 자식들이 많지도 않고 어머니처럼 허리 한번 펴지 못할 만큼 각박한 생활도 아니지만 나는 자주 지친다. 가끔은 상대적인 불행으로 괴로워하는 못난 구석도 많다. 아이 때문에 가슴이 오그라들 만큼 심장도 허약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한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를 흉내 내며 나는 오늘도 삶의 바지랑대 하나 가슴에 세운다. 언젠가는 내 삶의 바지랑대도 어머니처럼 지난날을 여유 있게 돌아볼 그런 날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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