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이 / 한경선
열무 한 단과 얼갈이배추를 샀다. 괜찮다고 하는 내게 노인은 굳이 덤으로 상추를 주섬주섬 담아 건넸다. 저물어 가는 길모퉁이에서 사람의 마음이 오고갔다.
김칫거리 간을 하려고 바삐 움직였다. 배추를 씻자니 달팽이 한 마리가 떼구르르 굴렀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배추 찌꺼기를 건져낸 작은 소쿠리 속에서 더듬이를 쭉쭉 펴고 움직이자 순간 손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내 생각의 중심에 배추만 있었기에 그 속으로 갑자기 뛰어든 달팽이는 작은 침입자였다.
더듬이를 감추고 가만히 있었으면 별 생각 없이 지나쳤을 텐데 달팽이는 의욕적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배추밭에서 마음 놓고 살던 달팽이가 시끄럽고 메마른 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갑자기 물에 빠져 휩쓸리다가 밖으로 나왔으니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생명을 위협받는 달팽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당황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가끔 있었다. 그땐 달팽이 몸집이 그보다 작았고 죽은 것 같아서 배추 쓰레기와 함께 아무런 갈등 없이 버렸다. 시골 같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김칫거리를 다듬고 남은 것과 함께 거름 자리에 던지면 거기서 따로 살아갈 방도가 있을 터이다. 그런데 나와 그 달팽이는 15층 아파트 꼭대기에 있었다. 아무렇게나 방치했다가 이런 기세로 기어 다니는 달팽이와 집 안 어디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서로 놀랄 건 뻔한 일이다. 그렇다고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목숨을 쓰레기 비닐봉지에 던져 넣거나 억지로 죽일 수도 없었다. 한 그래도 바쁜 시간에 달팽이 한 마리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서 화단에 놓아준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내게 무슨 그만한 자비심이 있거나 투철한 환경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쩔 줄 몰라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 사이 달팽이는 소쿠리를 넘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쿠리를 베란다 창가로 가져갔다. 방충만을 열고 손가락 두어 마디밖에 안 되는 공간에 그놈을 살며시 내려놓고 성큼 들어오기라도 할세라 문을 얼른 닫아버렸다.
거기는 푸른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창틀과 시멘트벽이 있을 뿐이었다. 곁눈질을 하며 보았더니 달팽이는 더듬이를 뻗으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나는 몹쓸 짓을 한 사람같이 마음이 불안했다. 달팽이를 던져줄까 생각도 했지만 돌에라도 부딪히면 달팽이집이 깨져버릴 것이기에 그럴 수도 없었고, 다시 데리고 오기엔 손이 간질거렸다.
슬며시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좌로나 우로나 아래를 봐도 달팽이가 살아남기 위해 가야 할 길은 아득했다. 아디 둘 곳 없어 허둥대는 달팽이 더듬이를 보니 내가 살면서 방향을 잃고 더듬거리던 날 그 답답했던 느낌이 가슴으로 밀려들어왔다. 지칠 때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희망을 향한 촉각을 곤두세웠듯이 달팽이도 달팽이답게 살기 위해 더듬이를 끊임없이 닦아오지 않았을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달팽이는 보이지 않았다. 달팽이를 살려주었다고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으로 내친 것이 아니던가. 말랑말랑한 흙과 연한 배춧잎을 쓰다듬던 더듬이로 딱딱한 시멘트를 더듬어 어디까지 간 것일까. 아파트 사방 벽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서야 운 좋게 발을 헛디뎌 화단 나뭇잎에라도 떨어지기를 바라는 어쭙잖은 동정심이 슬쩍 지나갔다.
식구들이 더운밥에 김치를 얹어 맛있게 먹는 밥상머리에서도 달팽이의 더듬이가 떠올랐다. 저나 나나 어쩌다 발붙일 흙 한 뼘 없는 회색 건물 꼭대기로 내몰려 왔는데, 손발 있는 내가 푸른 잎 하나 내밀어 주지 못한 옹졸한 마음이 서걱서걱 김치에 섞여 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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