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다리 쑥국 / 김은주
숨찬 겨울을 건너온 동백이 뚝, 하고 모가지를 꺾으면 통영으로 봄 마중을 간다. 이르게 핀 동백이 막 목숨을 다할 즈음 애쑥은 올라오고 도다리 몸에도 제법 살이 오른다. 얼어던 땅을 뚫고 올라오는 애쑥은 아직 초록을 띠지 못하고 이파리 가득 솜털이 하얗다. 두 닢 사이로 봄 햇살이 쏟아지고 바다 둔덕에 애채들이 잎을 틔우면 통영 바다색도 한결 순해진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를 조각공원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금방이라도 멸치 떼들이 튀어 오를 듯 눈부시다. 겨울 건너, 봄까지 산란을 마친 도다리 몸은 이때가 가장 차지고 쫄깃하다. 부풀대로 부푼 봄기운이 도다리 몸속으로 스며들었는지 적당히 기름기가 돌고 연해진 살이 애쑥을 만나면 그 맛이 순식간에 폭발한다.
이 폭발적인 맛을 보려면 중앙시장의 번잡함을 지나 서호시장에 가야 한다. 서호시장 터미널 앞에 가면 분소식당이 있다. 작은 테이블이 몇 개뿐인 이곳은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일하고 돌아온 뱃사람들의 쓰린 속을 풀어주던 해장 집이다. 주인장이 급하게 쓴 도다리 쑥국이라는 메뉴판이 벽에 떡하니 내걸리면 통영에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는 증거다. 해마다 들리는 통영이지만 매번 그 모습이 다르다. 내가 달라지는 것인지 통영의 봄이 달라지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여전한 것이 딱 두 가지가 있다. 도다리 쑥국과 청마는 늘 그 자리 그대로 바다를 지키고 있다.
미리 핀 동백들이 하나 둘 진자리에 애쑥이 올라오면 청마가 살았던 마당에도 봄볕이 짙어진다. 청마 생가 툇마루에 앉아 담장 너무 멀리 바다를 내다보면 코발트색 바다가 봄을 부르고 있다.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마땅할 이곳 통영에서는 누군들 술잔을 기울이지 않으랴. 지천으로 넘치는 해산물과 들썩이는 포구의 기운들이 술을 찾게 부추긴다. 아무리 엄전한 사내도 다찌 한 상에 뱃속을 훤히 드러내는 곳이 바로 통영이다. 무사히 건너온 겨울을 축하하며 한잔, 팽팽하게 다가 올 봄을 위해 한잔, 눈 뜨면 나가 싸워야 할 바다를 위해 한잔, 무참히 모가지를 떨어뜨린 동백을 위해 한잔, 봄이 술을 부르고 술이 또 봄을 맞는다.
이러니 분소식당은 아침부터 분주할 수밖에 없다.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늘 만석이라 길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 지난밤 숙취로 속을 풀어야 할 남정네들 일색인 식당 안은 혼자 들기에 쑥스럽다. 그래도 쑥국 맛을 잊을 수 없는 나는, 제일 구석진 자리에 앉아 도다리 쑥국을 시킨다. 주인아주머니가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되받아친다.
'도다리 쑤우국~‘하고
나는 잠시 쑥스러움을 물리치기 위해 입안에서 쑥국, 쑥국하고 혼자 되씹어 본다. 한참을 혼자 그렇게 말을 굴리고 있으니 봄날, 먼 산에서 들리던 뻐구기 소리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리는 쑥국이라는 말이 감칠맛이 되어 혀 밑에 와 고인다.
분소식당은 문이 둘이다. 하나는 시장 안으로, 하나는 부두 쪽으로 나있다. 나는 부두 쪽 방향으로 앉아 문밖을 내다보고 있다.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그새 가벼워졌다. 열어 둔 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다지 차지 않다.
부두를 내다보고 앉은 내게 김이 썰썰 오르는 도다리 쑥국이 당도했다. 우선 말간 국물부터 한 숟가락 맛을 본다. 코끝을 감싸던 쑥 향과 함께 남도의 된장 맛이 먼저 내 혀끝에 닿는다. 구수한 된장 맛 뒤에 탑탑한 쌀뜨물 맛도 함께 느껴진다. 뜨물과 된장의 절묘한 배합이 쑥 향과 어우러져 묘한 뒷맛을 낸다. 아주 조금 푼 된장이라 국물은 그저 말갛기만 하다. 이제는 도다리 속살을 발라 쑥과 함께 먹어 본다. 부드러운 도다리 살이 애쑥과 함께 입안에서 엉키더니 씹을 새도 없이 넘어가 버린다. 겨우내 까칠하던 입맛이 순간에 올라온다. 혀 아래 고여 오는 단맛이 언제 입맛을 잃었지 싶다.
적당히 더운 국물로 속을 지지니 금방 등에서 땀이 난다. 더운 국물이 주는 힘이다. 겨우내 정체되어 있던 몸 안의 기운들이 시원스레 한 바퀴 돈다. 이마에 화기가 도니 얼굴이 그새 맑아진 느낌이다. 잠자던 세포들이 툭툭 먼지를 털고 일어나 통영 앞바다를 내다보고 있다.
충분히 쑥국의 국물 맛을 즐기고 난 다음, 따뜻이 몸이 데워지면 흰 쌀밥에 파래무침을 얹어 한입 먹어 본다. 향긋한 바다냄새가 입안 가득하다. 겨울 한철 제 맛인 해초 또한 지금이 제철이다. 고소한 멸치 볶음, 짭짤한 오징어젓, 해풍 맞은 파 무침, 묵은 지, 밑반찬으로도 밥 한 그릇 뚝딱 먹을 수 있다. 이것저것 밥술에 올려 볼이 미어져라 먹어본다. 일부러 섞어 먹지 않고 하나씩 따로 먹어보는 이유는 반찬 고유의 맛을 즐겨보기 위함이다.
다른 테이블에서는 걸쭉한 목소리의 사내들이 졸복과 도다리 쑥국을 두고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고 서로 저울질을 하고 있다. 나는 지난해 먹은 졸복 맛을 떠올리며 한마디 한다.
'도다리 쑥국을 먹어야 봄이 제대로 오지요.'하니
힐끔 쳐다보던 사내들이 일제히 도다리 쑥국을 외친다. 아주머니 다시 주방 쪽에다 대고
'도다리 쑤우꾸욱'하며 길게 외친다. 그 목소리에 물기가 올랐다.
마지막 국물까지 비우고 나니 그릇에는 홍고추 몇 개만 남았다. 든든하게 속을 채우고 나니 나른하던 몸에서 다시 생기가 돈다. 도다리 쑥국을 먹던 고개를 들고 문밖을 내다보니 봄이 저만치 바다를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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