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미역 줄기 / 장미숙

미역 줄기 / 장미숙

 

 

 

밤새 몸을 푼 미역 줄기를 걷어내자 그릇 안에 소금이 한 주먹이다. 미역 줄기를 담고 있는 물은 숫제 소금처럼 짜다. 무슨 한이 그리도 많기에 이토록 짠 옷을 몸에 두르고 있었던가. 훌훌 털어버리면 가벼울 것을. 나는 짠물을 따라버리고 깨끗한 물에 미역 줄기를 헹군다. 소금기가 완전하게 빠지려면 여러 번 헹궈야 할 것 같다.

드디어 간이 밴 옷을 벗어버리고 가벼워진 미역 줄기에 윤기가 흐른다. 물기를 뺀 줄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양파와 마늘을 넣어 함께 볶아내자 간간한 맛이 제법 입맛을 당긴다.

참으로 오랜만에 먹어 보는 반찬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익숙한 맛에 피식 웃음이 난다. 한때는 절대로 먹지 않으리라 다짐한 반찬이었으니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지겹다는 것, 물리도록 먹어서 다시는 입에 대지 않겠다는 것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미역 줄기는 내 청춘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먹을거리 중 하나다. 가장 아름답고 꿈이 많다고 하는 이십 대 전후, 하지만 나의 젊은 날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활짝 피어나지 못한 꿈이 한없이 움츠러들어 끝내는 펴보지도 못한 채 저버린 시절이었다. 그래서인가 그 시절은 미역 줄기처럼 소금기 간간한 맛으로 재생된다.

중학교를 마치고 부모님 품을 떠나 자리를 잡은 곳은 부산이었다. 두 언니가 먼저 부산에서 터를 잡고 있던 터라 무조건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나는 언니들과 떨어져 혼자 사는 일에 익숙해졌다.

직장에서 얻어준 기숙사는 방 두 칸짜리 작은 아파트였다. 그때만 해도 아파트는 연탄으로 난방을 했다. 연탄을 갈아야 하는 불편함에도 아파트라는 것에 감지덕지했을 만큼 내 생활은 궁핍했다. 아니, 나랑 함께 생활하던 동료들의 처지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우리는 어침 여덟 시에 출근해서 온종일 직장에 매여 있다가 일곱 시에 퇴근했다. 하지만 정시에 퇴근하는 날보다 잔업을 하는 날이 더 많았다. 잔업은 열 시까지여서 하루 열네 시간 동안 중노동에 시달리는 게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일을 했지만, 우리 주머니는 늘 허전했다.

회사에서는 기숙사만 얻어줬을 뿐, 생활비는 우리가 충당했다. 여섯 명이 조금씩 돈을 모아 점심을 뺀 하루 두 끼 밥을 해결했다. 식사준비는 돌아가면서 했는데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돌아오는 식사 당번은 무척 부담스러웠다. 적은 돈으로 여섯 명의 입을 만족하게 하려면 적잖은 고민이 따랐다. 그러다 보니 싸고, 푸짐하고 만들기 쉬운 부식 거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 가장 만만했던 게 바로 미역 줄기였다.

미역 줄기는 조금만 사도 물에 불리면 많은 양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요리하기도 손쉬웠다. 잘게 잘라서 식용유 두른 팬에 마늘을 넣고 알맞게 볶아주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역 줄기도 여섯 명의 손맛에 따라 약간씩 모양과 맛에 차이가 있었다. 어떤 날은 소금기가 잘 빠져 간이 알맞지만, 어떤 날은 급하게 한 티가 역력해서 숫제 소금 맛일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어묵을 썰어 넣어 그나마 색다른 맛이 날 때도 있었고, 고춧가루를 넣고 밍밍한 맛에 약간의 변화를 줄 때도 있었다. 여섯의 손맛과 생각과 정성이 다르다 보니 미역 줄기의 모양과 색깔도 똑같진 않았다. 하지만 근본적인 맛은 하나였다. 미역 줄기의 그 짭짭한 맛, 그 맛은 바로 우리의 생활을 상징하듯 눈물 나는 삶의 맛이었다.

나를 포함한 여섯 명은 각자 나름대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공통된 점은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부모님 곁을 떠나 공장에서 뼈가 굵어가고 있는 참이었다. 그러니 한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많은 제약이 따랐고 경제적인 여건도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공장노동자의 월급은 형편없이 적었고, 그 월급마저 자신들을 위해 온전히 쓸 수 없었다. 더러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보내고, 더러는 오빠나 동생들의 학비로 사용되었다.

그런 형편이었으니 미역 줄기의 짜디짠 맛을 온몸으로 두른 것처럼 살지 않으면 생활이 어려웠다. 그래서 매일 미역 줄기가 상에 올라와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미역 줄기에 물려 소금기가 얼굴에 쌓일 때면 가끔 두부나 달걀 등으로 짠 기를 씻어냈다. 콩나물도 미역 줄기만큼이나 지겨운 반찬이었지만, 그도 만만한 것 중 하나였다. 육류는 아주 특별한 날이 아니고는 구경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고 멸 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버티어 냈던 건, 그만큼 삶의 의지가 강한 덕분이었다.

가끔은 소금기를 벗어버릴 수 있는 날이 있긴 했다. 직장에서는 단합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회식을 했는데 그때 가장 인기 있는 회식메뉴는 프라이드치킨이었다. 덕분에 회식이 있는 날은 우리 얼굴에 까슬까슬 묻은 소금기를 한 꺼풀 벗겨내는 날이었다. 빠듯한 삶을 잠시나마 벗어버리고 모처럼의 여유를 느낄 수 있어서 회식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버석버석하던 얼굴이 약간의 기름기로 펴진 다음 날이면 생산성을 올리느라 노동의 강도는 더 강해졌다.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월급날이면 우리는 시장으로 몰려갔다. 그날은 단맛과 매운맛으로 소금기를 씻어버릴 수 있는 날이었다. 붕어빵과 호떡, 떡볶이와 순대 등을 앞에 놓고 우리는 고달픈 삶의 비애를 풀어냈다. 다음 날이면 다시 푸르딩딩한 작업복을 입고 시끄러운 기계 앞에서 젊음을 조각낼지라도 매운맛과 단맛의 호사가 즐거웠다.

미역 줄기는 얼굴을 푸석하게 만들기만 했던 게 아니었다. 마음마저 움츠러들게 해서 이성을 향한 자신감도 소금에 절인 미역 줄기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건 열등감의 뿌리였다. 짝사랑으로 가슴앓이만 하다 그 마음을 상대방이 아닌 일기장에 털어놓는 게 고작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청춘의 한때를 절인 미역 줄기처럼 보냈다.

소금기를 털어줄 그 무엇이 필요했지만 우리는 그 무엇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애써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순응적인 삶에 길들어 그 밖의 세상을 보는 눈을 갖지 못했다. 더 멀리, 그리고 더 많이, 더 깊이 보려 하지 않고 주어진 삶에만 충실했다. 언젠가는 미역 줄기 반찬을 상에 올리지 않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직장을 그만둔 후, 나는 소금기에 푹 절여진 미역 줄기와 영영 이별을 고했다. 다시는 내 손으로 미역 줄기의 소금기를 풀어낼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궁핍과 단절과 고달픔을 상징했던 미역 줄기로부터 나는 그렇게 해방되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내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소금기가 미역 줄기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또 다른 삶 속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쩌면 그 시간 이후 몸에 두른 소금기에 비하면 미역 줄기의 소금기는 그래도 웃으면서 견딜 만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를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라도 번지니 말이다.

이제 나는 또 다른 삶 앞에 초연히 서 있다. 이 시기는 또다시 먼 훗날 어떤 맛으로 기억될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