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붓꽃 / 홍도숙
그해 유월 나는 각시붓꽃으로 환생한 엄마를 만나려고 회목리 가는 길섶에 있는 진펄밭에 매일 나갔다. 뾰족한 붓끝 같은 꽃 봉우리가 아득히 들리는 엄마의 웃음소리 따라 흔들리고 부풀려서 여기저기 터지느라 바빴다. 환생해서도 엄마는 역시 바쁜 것 같았다.
늪지 가득 각시붓꽃이 군락을 이루고 군데군데 진노랑 원추리 꽃도 끼어 있었다. 남빛치마를 바쳐 입은 엄마가 각시붓꽃포기에서 언듯언듯 보이는 것도 같았다.
엄마는 당신이 각시붓꽃으로 환생해야 나와 자주 만날 수 있고 만져볼 수도 있다고 믿었는지 모를 일이다. 지난해만 해도 아이들과 어울려서 아무렇게나 매착없이 꺾어간 붓꽃을 엄마는 곱게 간추려서 항아리에 꽂으며 “다음엔 밑둥까지 길게 꺾어라.” 하시며 짧은 꽃도 작은 항아리에 알뜰히 꽂았었다.
나는 엄마가 각시붓꽃으로 환생한 것을 믿은 후부터 꽃을 꺾지 않았다. 엄마가 너무 아파할 것 같아서. 다른 아이들에게도 꺾지 말라고 부탁했다. 꽃을 꺾어도 받아줄 사람이 없고 항아리에 꽂아 줄 사람도 없었다. 엄마가 없는 집은 불탄 집처럼 황량했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엄마가 없는 데도 여전히 아침이 오고, 밤이 들고,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연초록 갈대 잎에 싸인 편편한 반 평쯤 되는 늪지의 바위는 내 방이었다. 바위를 둘러싼 갈대들이 자연스럽게 내 방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어쩌다 잠이 들면 바람을 탄 갈대들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아이들은 집으로 나를 찾아오듯 늪지의 바위로 몰려오곤 했다.
거기 앉아 있으면 산후조리에 바쁜 물총새부부의 산실도 보이고, 저만치 꽤 깊은 웅덩이 연못에 띄워놓은 조각배도 보였다. 배는 바람이 자면 저도 함께 졸다가도 바람이 일면 저도 덩달아 빙그르르 돌았다.
늪지 둔덕에 물총새가 깊이 구멍을 뚫고 둥지를 틀었다. 새 식구를 얻은 부부는 기쁨에 들떠 보이고 코발트색 깃털은 더욱 선명하다. 그런데 그런 물총새가 밉고 징그러울 때가 있다 파닥거리는 은어나 모래무치의 옆구리를 턱하니 가로 물고 있는 물총새의 억센 부리가 밉고 눈이 부신 코발트의 날개도 칙칙하고 미웠다.
물속의 먹이를 겨냥하고 공중에 펴서 날갯짓을 요란하게 할 때는 난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은 총알같이 입수해서 제 몸만 한 물고기를 노획한 물총새에게 멋진 묘기라며 갈채를 보냈다.
그때는 몰랐던 각시붓꽃의 꽃말이 ‘신비한 사람, 존경’이라는데 그리고 보니 아, 틀림없이 각시붓꽃은 엄마의 화신이었다고 믿어진다.
꽃말처럼 엄마는 신비한 사람이었다. 장티푸스 전염병이 온 마을을 뒤덮었을 때 엄마는 팔을 걷어 부치고 감염된 농장식구들을 간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지쳐 쓰러진 채 소생하지 못했다. 병에 걸렸던 사람들을 모두 일으켜 주고 자신은 마지막 제물이 되었다.
서른여섯의 엄마는 각시붓꽃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여전사처럼 씩씩했다. 엄마의 생은 신비 그것이었다.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았다. 봄이 오는 삼월에 엄마를 보낸 뒤 농장식구들은 넋을 잃고 손을 놓은 채 일을 할 수 없었다.
우린 모두 실낙원의 떠돌이별이 되었다. 슬픈 유성우처럼 어느 땅 위로든 떠내려가야 한다. 정든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갔다.
그들이 떠나갈 때마다 각시붓꽃은 오열하며 몽우리를 터뜨렸다. 야생의 여름 꽃으로 환생한 엄마는 가여웠다. 온몸으로 웃고 울며 오열해도 품어줄 수도 쓰다듬어 줄 수도 없다.
그해 늪지에서의 그것이 엄마와의 마지막 면회였다. 같은 해 팔월에 해방이 되었고 그리고 십일월에 엄마의 무덤을 두고 환생한 각시붓꽃을 두고 검불랑(劒拂浪)을 떠나왔으니까.
어려서 엄마의 환생을 믿은 것처럼 이제 머지않아 당신과의 재회를 믿는다. 그리고 살아오는 동안 용렬한 내가 요만큼이라도 사람을 사랑할 줄 알게 한 것은 엄마로 인한 것이고, 요만큼이라도 마음을 선하게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엄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고작 십삼 년 동안의 인연뿐이었지만, 천 년보다 깊고 깊은 사랑을 품어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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