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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쉼 / 남홍숙

/ 남홍숙


 

 

화려하지 않아 눈길이 갔다.

꽃잎 하르르 지지 않았지만 분명, 꽃이라 부르기가 민망했다. 뭇 꽃들은 잎이 돋기 전에 떠나야할 시간을 알고, 때 되면 꽃잎 하르르하르르 쏟지 않던가.

하지만 콩고물 같은 것을 아끼듯 밀어내는 뒤뜰 망고 꽃은, 잎이 돋았는데도 고요했다. 잎의 공간에서 잎들과 더불어 지내다 시나브로 낙화하였다. 그 터에 오롱조롱 열매 맺더니, 4분 음표같이 생긴 열매를 한 꼭지에 한 알씩 남기고 다 떨어트렸다.

작은 음표 하나로 인해 소리의 맛이 생성되는 게 믿기지 않듯이 이 작은 열매 또한 숙성된 망고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슬며시 망고의 단맛을 기대했을까. 창밖으로 망고나무를 지켜보는 두어 달의 기간이 꽤 지루하게 느껴졌다.

한때, 달달한 혀의 감촉뿐 아니라 안속까지 동질의 정교한 질감으로 스며드는, 망고의 신성한 미감에 빠져든 적이 있다. 별빛을 마신 듯 노랗게 물 든 망고의 속향이 입 안을 달콤하게 감싸는 맛은, 어떤 과일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 나는 아침마다 한 알에 3불짜리 비싼 망고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꺼내 먹곤 했었다.

망고의 불이 발갛게 물들고 오동통 살이 오르는 모습은 달콤함을 꿈꾸는 추임새다. 그때부터 망고의 속살은 명주실만큼이나 결 고운 노랑으로 익어가는 게다.

어느 날부터인가. 망고나무에서 포섬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냉장고에 든 음식 꺼내 먹듯이 밤마다 포섬은 망고를 갉아먹은 흔적을 남겼다. 박쥐도 그것을 눈치 채고 포섬과 밥그릇다툼을 하며 푸드득푸드득 저녁 날개를 쳐댔다. 칠면조같이 생긴 부쉬터키란 놈은 나무 밑에서 낙과가 되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으면 제 새끼들까지 거느리고 나와 가든파티라도 하는 양, 빙 둘러서서 망고의 살을 발라 먹곤 했다. 동물들도 나처럼 망고를 이토록 즐겨 먹는다는 사실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동물들이 다 해치우기 전에 사다리에 올라가 망고를 하나씩 따 담았다. 아까웠지만, 이웃에 몇 알씩 나누어 주고도 아직 한 광주리 가득 담겨 있으니 올해 우리 집 망고농사는 대풍이다. 나무가 높아 스무 알 정도는 따지 못했다. 고향의 감나무 꼭대기에 까치밥 남기듯 포섬이나 박쥐, 부쉬터키나 새들의 양식이 되길 바라며 가만히 남겨두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이들은 포악무도하게 망고의 살점을 뜯어 먹었다. 하루저녁에 못다 먹은 망고는 반쪽이 파 먹힌 상태로 허공에 매달려있어야 했고, 이튿날은 나머지 반쪽마저 잔인하게 쪼아 먹혔다. 앙상하게 씨만 남은 망고는 공중을 아프게 흔들었다.

망고의 헐벗은 몰골을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자꾸만 눈에 어른 거렸다. 반 주검의 상태로 나무 끝에 매달려 비감의 음을 탄주하는 망고를 보면서 사람의 속도 이렇게 무참히 무너질 때가 있음을 느꼈다. 절벽같이 무모한 세상으로 오늘 밤도 망고는 중력을 못 견딘 채 땅바닥으로 툭 떨어져 물컹한 살덩이를 뭉그러뜨릴 것이다. 그리고 부쉬터키는 쪼르르 달려와 남은 살들을 또 콕콕 쪼아 먹을 것이다.

어느 날은 나도 모르게, 망고나무 앞에서 눈물이 났다.

하지만, 자신의 몸이 소멸되는 현상 속에서도 망고는 민감한 색감과 달콤한 맛을 꾸준하게 익혀내고만 있었다. 제 살 먹히고 쪼이는 현실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것 같았다. 다만, 유형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달콤한 향을 고여 내는 숙성미를 점점 농 짙게 표현하고 있었다. 제 몸이 박살나면서까지 누군가에게 더 달콤한 향을 내어주는 것, 그것만이 망고의 치열한 삶의 목표처럼 보였다.

황량한 것이 사막의 삶이라면 초원의 삶은 푸름이듯, 최선의 향기롭고 단 맛을 누군가의 목구멍으로 넣어 주는 것, 그것이 망고의 생이었다.

그래, 망고의 생의 계절은 절벽으로의 낙과와 갉아 먹힘, 쪼아 먹힘의 절정이었던 거다. 그 달콤하고 향기로운 먹힘을 위하여, 한 해의 서사를 잔인하도록 야무지게 마무리하고 있었다. 아주 충일한 망고의 계절을 통과하고 있었던 거다.

망고나무는 이제, 한 계절의 연주를 마치고 연미복을 벗었다.

열매를 떠나보낸 후, 옷 갈아입은 망고 잎사귀들은 하늘에 차분히 들고, 햇살은 흰빛으로 잎들을 감싸 안는다. 마실 온 바람은 잎새 끝에 잔잔히 머물다 온쉼표하나 가지에 걸어주고 살며시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