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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흰 고무신 / 김여진

흰 고무신 / 김여진  

 

 

 

문을 열고 들어서면 눈에 띄는 신발이 있다. 고무신은 나에게는 편안함을 준다. 옛날이 그리워서일까. 흰 고무신을 신고 있으면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다. 일하다 흙으로 더러워진 신발을 벗어서 비누로 뽀얗게 닦으면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시원한 물로 세수한 것처럼 마음마저 시원해진다.

언제나 하얗게 잘 닦아진 흰 고무신을 즐겨 신으시던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할아버지에겐 외출하실 때 모시적삼에 잘 어울리는 우윳빛 고무신이 제격이었다. 댓돌에 나란히 놓인 흰 고무신이다. 할아버지는 한손에 지팡이를 들고 큰 기침을 하며 휭하니 집을 나서곤 했다.

우리 집에서 더러워진 고무신을 닦는 일은 내 몫이었다. 조그마한 손을 신발 속에 넣고 돌에 문지르거나 거친 모래와 볏짚을 부드럽게 만들어 닦았다.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요리조리 힘을 다하다보면 어느새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아무리 닦아도 지금처럼 깨끗이 닦이지는 않았다.

어느 때는 온 식구의 고무신을 들고 개울가로 나갔다.누가 깨끗이 닦는가 내기를 했다. 남자 고무신은 그래도 닦기에 편했다. 하지만 엄마의 고무신은 코처럼 뾰족해서 잘 닦이지 않았다. 낡은 신을 돌에 문지르다 보면 찢어지기도 했다. 꾀를 내서 요리조리 살펴가며 깨끗하게 닦인 신발은 발을 더욱 빛나게 했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좁은 구두를 신고 하루 종일 서울 한복판 남산을 걸었다. 친구 아들 결혼식이 마침 남산에 있는 예식장에서 있었다. 축하를 위해 가는 길이라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멋을 낸답시고 구두를 신고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외출할 때 가끔씩 신는 구두였다. 발이 조여드는 아픔을 알지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옷에 구두를 맞춰야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남산에 온 것이 십 수 년 만이라며, 이구동성 남산 타워에 가기를 원했다. 서울에 살아도 가기 힘든 곳이라 했다. 서울의 밤은 눈이 부셨다. 친구들은 옛 모습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곳이 창경궁이야. 시청 옆이 덕수궁이야. 맑은 날에는 강화도도 보이고, 인천 바다도 보여!" 한강의 다리도 세어보며 소녀시절로 돌아가 낄낄거렸다. 그러는 동안 내 구두 속에서는 발이 서서히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예의고 뭐고 편한 고무신을 신고 왔어야 하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절룩거렸다. 내려가는 길은 케이블카를 탔다. 혼자 생각을 주장할 수는 없었다. 한참을 걸어야 전철을 탈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을 예상했다면 멋내기 위한 구두를 신지 않았어야 할 일이었다.

신발은 어쩌면 그 사람의 얼굴이라 해도 좋다. 그래 구두가 깨끗하면 깔끔한 성격까지도 알 수 있다. 그래서인가. 많은 신발 중에서 편하게 하는 한 가지만을 고집하는 이도 있다. 등산 갈 때는 등산화, 걷기운동을 할 때는 러닝화 등 철따라 옷에 맞춰 신발을 구비해 신발장 가득 신을 갖고 있다.

나에게 있어 신발이란 오직 고무신 한 켤레였다. 일할 때나 나들이할 때 오직 고무신 한 켤레로 만족해했다. 그래서 행여 까만 고무신이나 흰 고무신이 가득 놓인 잔칫집이나 상갓집에 가면 신발이 뒤바뀌어 야단법석이 나곤 했다.

누군가 일부러 헌신을 신고 와서 새신으로 갈아 신고 갔으랴. 하지만 바뀐 신발로 오래도록 억울해하기도 했다. 그날 본 얼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신발 바꿔 신고 가지 않았느냐?" 묻는 게 인사가 되기도 했다.

논두렁 밭두렁에 주인을 기다리는 신발은 땡볕이나 진흙 속에도 한가지다. 넓적하니 별 모양은 없어도 발에 편안함을 주고 친근감을 주는 흰 고무신을 나는 즐겨 신는다.

비가 오면 물이 들어가지 않아서 좋고, 일할 때는 발바닥에 닿는 흙의 느낌이 좋다. 장에라도 가는 날이면 뽀얗게 닦아낸 고무신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받아서 좋다.

일하다 이것저것 바꿔 신는 것이 때론 번거롭기는 하다. 해서 나는 편안함과 편리함 때문에 흰 고무신을 즐겨 신는다. 밭두렁에서 묻은 진흙을 미처 닦지 못해 흰 고무신이 누렁 고무신이 되어도 그런 신발이 내겐 안성맞춤이다.

발이 편해야 몸이 편하다 했던가. 종일 발을 옥죄었던 구두를 벗어버리고 흰 고무신으로 갈아 신으니 날아갈듯 걸음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