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설(說) / 최근복
302호 할머니는 집을 나서며 공짜로 온천을 하게 되었다고 들뜬 기분이었다. 그런데 웬걸, 해가 기우는 저녁나절에 그만 얼굴이 반쪽이 되어 돌아왔다. 온천은커녕 근처에도 못 갔다니 궁금했다.
숲이 우거진 외진 산골에 사슴 뿔을 파는 악당의 한 패가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관광객들을 방 안이 빽빽하도록 앉혀놓고 등판이 떡 벌어진 거구의 젊은 남자들이 문을 지키고 있더란다. 하나같이 웬일인가 싶어 숨도 크게 못 쉬고 오는 정, 가는 정을 들먹이는 선전을 들어야 했단다.
일전에 그들에게 공짜로 받은 물품이 있었다. 해서 어지간한 값이라면 하나 사리라 마음먹었으나 한 달 생활비 버금가는 금액이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잠자코만 있었다. 그런데 메모지와 펜을 손에 쥐어주며 사인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그들의 목소리까지 우렁찼다.
횡포에 눌려 간신히 사인하고 신생아 팔뚝만 한 녹용을 하나씩 샀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지혜로운 한 노인은 복통을 핑계로 화장실에서 아들과 통화가 이루어져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할머니는 사인을 하였으니 머잖아 대금청구서가 날아들지 않겠냐며 울상을 지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뉴스에 보도된 사기단은 낯선 사람들이 아니었다. 굴비두름 엮이듯 줄줄이 오라에 포박당한 일행은 며칠 전까지도 가설극단에서 구수한 노래와 개그의 입담으로 할머니들을 즐겁게 해주던 일당들이었다.
고수부지엔 한 달여 동안 천막을 치고 건강보조식품을 선전하던 곳이 있었다. 할머니는 그곳을 출퇴근하다시피 했다. 밀가루와 설탕, 화장지등을 공짜로 받아오는 재미를 대견히 여기더니 녹용값 부담이 어지간히 속을 훑으시는가 보다.
한때 미용실을 경영한 일이 있었다. 추수가 끝난 늦은 가을, 그날은 횡성 5일장이 서는 날이었다. 장날인데도 손님이 없어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허름한 트럭 한 대가 미용실 앞인 장터에 짐을 풀었다.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의 옷차림은 오너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허연 살가죽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찢어진 옷은 누가 봐도 측은지심을 일으킬 만했다.
무릎이 삐져나오고 팔꿈치도 드러나 보였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우람한 체구였다. 지리산에서 삼십 년을 도를 닦았다고 했다. 그곳에서 여러 가지 약초를 고아 만든 만병통치약이라고 했다. 알고 보니 약장수였다.
그들이 팔려고 쌓아놓은 물건 앞에는 커다란 나무 상자도 있었다. 그속엔 다리도 달리고 뿔도 있는 뱀이 들어 있다고 했다. 온 시장바닥이 들썩하도록 전설 같은 이야기를 확성기로 나발을 불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설마하면서도 다리와 뿔이 달렸다는 뱀을 보려고 불시에 사람들은 회심의 미소를 보이며 장터를 가득 메웠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상자가 열리기를 고대했다. 하지만 상자는 좀체 열리지 않았다. 좀 더 많은 구경꾼이 모이면 열겠노라고, 약을 많이 팔아주면 열겠노라고 연신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그리곤 약 선전에만 거품을 물었다. 내 깐에도 상술인 줄 뻔히 알면서 상자 속이 궁금했다.
그들은 약을 팔다가도 간간이 차력을 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몸을 쇠사슬로 묶어 놓으면, 순식간에 쇠사슬을 풀며 탈출하는 묘기를 보여 박수를 받았다. 베개만 한 돌을 맨 이마로 쳐서 박살을 내는 위력에 구경꾼은 적잖이 주눅이 들기도 했다.
이층에서 내려다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트럭 뒤편이 바라 내가 있는 미용실이니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목격할 수가 있었다. 선전을 마친 오너는 손을 드는 사람들을 향해 선착순으로 약을 건넸다. 여기저기서 "나도요, 나도."하며 아우성이었다. 돈을 내고 약을 받아든 사람 대부분은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떴다.
그리고는 트럭 뒤로 다시 와서 돈과 약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를 네댓 번 했다. 그들이 약장수와 일행인 바람잡이인 줄 순진한 시골 사람들이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번엔 새로 개발한 카메라라고 했다. 차리고 산다는 집에나 있음직했으나 너나없이 갖고 싶은 마음은 희망사항뿐이었다. 워낙 고가여서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시골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한 걸까. 개업기념이라는 것을 내세워 십 분의 일 값도 안 되는 가격에 판매한다며 구경꾼을 현혹했다.
쌀 두 말 값이라고 했다. 시골구석에서 추수를 끝내고 모여든 농부들이니, 그까짓 쌀 두 말 값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약장수 일행들이 먼저 사겠다고 손을 들자 삽시간에 카메라는 팔려나갔다. 오히려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들이 장터를 자리 잡은 지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트럭 주변으로 언제 나타났는지 검정색 자가용이 몇대 늘어서 있었다. 카메라를 사느라고 정신없는 사이에 옷차림이 남루했던 그들은 승용차와 세트인 양 검정색 가죽점퍼차림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눈알도 보이지 않는 검은 안경에, 가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검은 가죽장갑을 꼈다.
그리고는 태권도라도 하는 모양새로 발을 들어 허공을 냅다 차기도 했다. 그야말로 한 주먹 한다는 뒷골목 패거리들 같아 보였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곧 뿔이 달린 뱀과 한판 격투라도 벌이려는가.
어쩌면 흥미진진한 일이라도 있으려나 싶었다. 그러나 상자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은 트럭으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샀던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작동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반품을 원했으나 자가용의 문도, 트럭의 문도 열리지 않았다.
그들은 가짜물품을 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 사이로 구름 같은 흙먼지를 일으키고 도망치듯 장터를 빠져나갔다. 무리 속을 줄줄이 빠져나가는 검은 물체들은 여전히 한 마리의 사악한 뱀과도 흡사했다.
상심해 있을 할머니를 찾았다. 위로해 드리려고 삼십대에 꾼 적이 있는 용꿈 이야기와 약장수 얘기로 너스레를 떨었다. 상기된 얼굴로 내 수다를 듣고 있던 할머니는 "쳇! 그런 짐승이 어디 있노? 미친놈들, 거짓부렁으로 서민들 울리는 불한당패였군! 내가 나이를 헛먹었지. 암!" 하고 내쏘고는 전에 없이 연신 흐흐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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