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들 / 윤근택
참말로, 그들은 내 가슴속에서 명멸(明滅)하던 불빛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내 가슴속에서 뜨고 지던 별들이었습니다. 내가 여태 간직한 이름들은 이제 여남은 개에 불과합니다. 본디 폭넓게 사람들을 사귀지는 않았던 편입니다. 오늘밤 그 남은 이름들 가운에서도 한, 둘을 골라 또 지워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순전히 나의 심술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현대를, 인터넷 시절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자주 겪는 일일 테지요. 위 단락의 내용은 내 PC에 간직하는 e메일주소에 관한 이야깁니다. e메일 주소야야말로 그들의 또 다른 이름일 테고, 나는 그들의 별명이기도 한 e메일주소 내지는 아이디를 알고 추파(秋波)를 던져, 교신(交信)을 청한 적도 많았습니다. 또, 더러는 상대쪽에서 나의 이름을 알아, 나한테 먼저 말을 걸어온 예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교신을 나누어 왔던 사이는 지극히 드물었습니다.
오늘밤 e메일의 ‘주소록 관리’를 클릭했더니, ‘미분류 18’, ‘최근 등록주소 2’, ‘ddd 2', '휴지통186’ 등의 정보가 있습니다. 이들 정보 가운데에서 ‘최근 등록주소 2’는, 내가 새로 사귀고픈 이의 이름이 둘임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이들 정보 가운데에서 특히 내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은, ‘휴지통 186’입니다. 살펴본즉, 중복되는 이름도 꽤나 많습니다. ‘순수’ 또는 ‘순수한’으로 풀이되는 영어이름, ‘푸른’ 혹은 ‘파란’으로 새길 수 있는 영어 이름, ‘이슬비’로 풀이되는 영어이름 등이 그 중복된 이름 가운데 그 빈도(頻度)가 많다는 것을.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가 싫어했다가를 반복했다는 뜻이 아닌지요. 아니, 속된 말로, 그들이 내 맘에 쏙 들었다가 아니 들었다가를 거듭했다는 거겠죠. 그 ‘휴지통 186’ 명단 가운데에는 이런 경우도 있었을 겁니다. ‘매일매일’ 읽어보라고 이름지어진 ‘메일(mail )’이거늘, 상대가 게을러터져서 나의 메일을 꼬박꼬박 아니 읽은 통에 심술이 나서 지워버린 경우도 있겠지요. 어쩌면 그들 가운데 몇몇은 e메일 계정을 부여받고도 도통 아니 써서 ‘DAUM' 혹은 ’NAVER'로부터 아예 퇴출(?) 당한 예도 있을 테고요. 그러한 경우를 ‘휴면계정’이라고 하데요. 사실 위와 같은 사정으로 ‘휴지통186’에 포한된 것은 덜 가슴 아파요. 상대의 ‘수신거절’로 인해 더 이상은 내가 그에게 편지를 띄울 수 없어 휴지통에 버려진 이름도 있다는 것을. 그런 경우 무척 가슴 아리데요.
참말로, 그들은 내 가슴속에서 명멸(明滅)하던 불빛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내 가슴속에서 뜨고 지던 별들이었습니다. 내가 여태 간직한 이름들은 이제 여남은 개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이름’이었습니다. ‘이르다[謂]’에서 비롯되어, ‘일러’, ‘이르되’ 꼴로도 활용되는 그 ‘이름’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각자 이름들을 끝끝내 소중히 간직할 줄을 몰라 해 왔습니다. 탄식합니다. ‘일컫다’, ‘이름하다’, ‘이름짓다’와도 관련되는 그 이름들. 그 ‘이름’은 ‘reach’, ‘early’, ‘from to’, ‘lead’로 풀이되는 그 ‘이름’과는 아주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이제 내 PC에 남은 ‘e메일 주소’는 여남은 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이름이 휴지통에 가게 될는지요. 그러나 나는 너무 낙심하지는 않습니다. 내 이름 ‘윤근택’ 또는 ‘이슬아지’ 또는 ‘yoongt57’만은 내 살아있는 동안, 아니 죽은 후에도 남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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