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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젊음을 훔치다 / 이귀복

젊음을 훔치다 / 이귀복

 

 

 

생선을 손질하여 냉동실에 저장하려는데 내용물이 꽉 찼다. 내친 김에 냉장고 청소나 하려고 냉장고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모두 꺼내기 시작하자 비닐 뭉치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가족들 간식으로 얼려 둔 찰떡에서부터 지난 연말 지인이 보내준 옥돔 몇 마리, 그리고 두어 해는 묵혔음직한 삶은 쑥이 얼음덩이가 되어 얼굴을 내밀었다. 대부분 잊어버린 채 냉장고에 방치해 두었던 것들이라 두서없는 내 살림솜씨를 스스로 확인하는 꼴이 되었다. 혼자 부끄러워 냉동실의 허접한 것들을 계속 꺼내고 있는데 안쪽에 플라스틱 용기 하나가 눈에 띄었다. 보나마나 생선 토막이겠지 생각하며 뚜껑을 여는 순간 너무 놀랐다. 그 속엔 생선도막도 얼린 고기도 아닌 매화꽃이 한 가득 얼려져 있었다. 비록 언 매화이지만 그래도 짙은 암향이 거실에 확 퍼졌다. 한 여름에 맡는 매화향기라니! 나는 반가움과 함께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낭패감으로 잠시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해마다 봄을 기다리는 것은 눈바람 속에 피는 매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귀 시린 늦겨울 바람을 맞으면서도 공원을 산책하는 아침이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매화를 기다리는 기쁨 때문이었다. 바람이 순해진 봄날, 은은한 매화 향기가 온 공원에 감돌기 시작하면 내게 봄은 더 이상 은밀한 기쁨이 아니다. 환희로 폭발할 것 같은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나이에 어디 가서 그런 혼절할 사랑을 느낄 수 있겠는가.

 

뚝뚝 떨어지는 목련이 주체할 수 없는 비애라면, 이른 봄의 매화는 암팡지고 당당하다. 게다가 사라질 듯 감도는 그 향기는 용서되어질 수 없는 유혹이다. 예로부터 매화를 사군자니, 선비의 꽃이니 예찬하지만 내게 있어 그건 틀린 말이다. 매화는 그 향기만으로도 이미 에로틱한 꽃이다. 스칠 듯 말 듯한 향기로 잠시 곁을 맴돌다가 어느 순간 몸을 사리는 대단한 마력의 여인이다. 매화는 20대 여인은 도무지 꿈꿀 수 없는, 절제와 품위와 관능까지 지녔다. 아무리 꽃이 아름다워도 열흘 넘기기가 어렵다고 했던가. 봄이 무르익으면 매화도 지게 마련이다. 흰 주검으로 떨어지는 매화를 바라보는 일은 이울어져 가는 내 젊음을 바라보는 것만큼 애절했다. 그 무렵 나는 매화를 오랫동안 간직할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것은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남모르게 매화를 따 모으는 일이었다. 지난 봄 나의 산책은 매화를 훔치러 가는 길이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람의 눈을 피해 매화가지에 손을 얹어 꽃송이를 따는 순간, 뛰는 가슴과 등줄기를 훑어 내리는 땀은 지독한 내 갱년기 증세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매화를 따 모으는 것이 아니라 사위어져가는 내 젊음을 조금이라도 멈추기 위한 행위였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다.

 

냉동실에 얼려진 매화는 이렇게 모여진 것이었다. 한동안 나는 매화향기를 영원히 내 것으로 결빙시킨 희열에 들떠서 가는 봄도 아쉽지 않았다. 나의 봄은 그렇게 오랫동안 얼려진 채 나를 충만하게 해 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나는 오래지 않아 그 봄을 잊어버렸다. 몸서리치던 그 관능의 암향도 시간 속에 까맣게 묻은 채 이 여름을 잘도 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매화를 사랑한다는 집착에 못 이겨 향기까지 박제해 버린 죄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나는 매화의 아름다움을, 그 고혹적인 젊음을 남 몰래 훔쳐 냉동실에 가득 얼려 박제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강물은 흐르기 때문에 아름답다. 강물이 흐르지 않는다면 썩어가는 늪에 불과할 것이다.

 

냉장고 속에서 영혼마저 결빙된 매화를 두고 어찌 더 이상 매화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매운 눈바람을 이기고 스스로 피어날 때 비로소 매화인 것을.

 

가끔 가다 무덤 속의 미라 발굴을 뉴스로 접할 때가 있다. 그 미라를 통해 한 시대의 모든 생활상이 고증되기도 하지만 미처 흙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 모습은 보기가 민망하다. 그 미라가 사대부가의 여인일수록 더욱 곤혹스럽다. 죽어서도 은밀해야 할 여인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드러날 때 그 영혼은 자신의 품위를 유린당한 고통에 괴로워할 것이다. 그렇다, 아름다움은 살아 있는 순간 속에 존재한다. 매화는 눈바람을 맞으며 스스로 피어나는 그 때 비로소 매화인 것이다. 찰나 속에 존재하는 영원의 의미를 이 나이가 되도록 왜 나는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