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초심(首邱初心) / 맹난자
바람이 분다. 손바닥만한 플라타너스 잎새 한 장이 발 밑에 와 떨어진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제 곧 추위가 오리라. 솜옷을 입고 연탄을 들이고 김장을 걱정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가슴에 신호를 긋고 지나가는 한파는 미리부터 우리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든다. 부엌에 어머니가 서 계신,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을 나 또한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그리하여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다. 가족들보다 먼저 도착하여 거실에 불을 밝혀 놓기 위해서다.
아파트 문을 열고 전기 스위치를 켜면 '반짝'하고 들어오는 불빛이 삽시간에 어둠을 몰아내듯이 식구들 마음속의 한파도 그렇게 물러나게 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래 본다. 그러나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 밖의 추위인들 어찌하겠는가. 제몫의 본원적인 풍우와 한파임을.
어느 시인의 말대로 가을은 외로운 나그네가 앞서 듣는다. 나그네의 계절, 가을이 되면 해마다 만 리 밖 나그네 되어 떠돌던 방랑 시인 김삿갓이 먼저 떠오른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자신의 한평생을 돌아보며 '난고蘭皐 평생시'를 썼다. '수구초심'이란 말을 나는 거기에서 아프게 만났다.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건만 내 평생은 집도 없이 외로운 나그네로 슬퍼했도다. …'심유이역 수구호心猶異域首丘狐' 마음은 오로지 타향에서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둔 여우요. 삿갓을 한 번 깊게 눌러 쓰고 떠나온 집을 그냥 스쳐 지날 뿐, 들르지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자신에게 부과한 형벌 때문이었다. 산문山門 밖에 서 보아야 산의 전체가 바라보이듯 고향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고향, 그것은 떠난 자의 가슴에 남아 있는 이름이며 실패한 사람에겐 돌아가 눕고 싶은 땅이리라. 그러나 끝내 고향 땅에 묻히지 못하고 망부석처럼 고향 바래기를 하며 오늘도 모리오카盛岡, 망향의 언덕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이 있다.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자신의 말대로 '돌팔매에 쫓겨나다시피' 떠나온 고향이건만 그는 시부타미를 못 잊어 했다.
보덕사의 주지였던 아버지의 가출과 교장 배척 스트라이크에 관련된 자신의 면직 등으로 다쿠보쿠는 돌팔매에 쫓기듯 고향 시부타미를 떠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직장을 찾아 하코다테의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동경에 와서 지병이던 폐병이 악화되어 26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지만 그는 고향 사투리라도 듣고 싶은 마음에 우에노역을 떠돌았다고 한다.
"정들은 고향 사투리 그리워, 정차장으로 붐비는 사람 속에 고향 말 찾아가네."
라고 노래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그의 어머니도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일 년 뒤 아내마저 폐병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나는 몇 해 전, 모리오카에서 그의 동상과 만났다. 전통 일본 복장을 갖춰 입고 소매 속에 양손을 포개 넣은 채, 이와테산이 바라보이는 쪽을 향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와테 산정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그는 만성복막염 수술 후,
"오늘도 다시 가슴에 통증을 느끼네, 죽을 거라면 고향에 돌아가서 죽고 싶다 생각하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동경에 있던 그의 유해는 하코다테의 아내 곁으로 옮겨졌다. 고향은 고향을 떠난 자의 몫이다. 떠나 보지 않은 사람은 고향을 알 수 없다.
'수구초심, 옛 사람의 말에도 여우가 죽을 때는 머리를 제 살던 쪽으로 둔다고 한다. 그것은 인仁을 행하는 마음이다,' '수구초심'이 어찌 이과 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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