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기풀이 / 윤근택
지난 주말, 가족을 만나러 갔더니, 작은딸이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늘 긴 머리를 빗어 넘겨 방울을 묶어대던 녀석. 중학생이 되자, 교칙에 따라 단발머리를 한 모양이다. 우측 머리에다 앙증스런 핀도 하나 꽂고 있었다. 그 핀이 녀석을 더욱 야지랑스럽게 보이도록 했다. 핀을 슬쩍 뽑아 등 뒤에다 감추었더니, 녀석은 귀엽게 눈을 흘기며 그걸 빼앗았다. 그리고는 이빨로 벌린 후 다시 꽂았다. 순간, 내 가슴이 묘하게 떨렸다.
지금은 다시금 자취방. 그 '떨림'의 정체를 속 시원히 알아내지 못해 끙끙댄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범법犯法을 상상한다. 때로는 머리핀을 뽑고 싶었다는, 댕기를 풀고 싶다는, 머리핀이든 댕기든 여성들만의 장신구. 나한테는 없는 장신구. 그러기에 유년시절부터 여태껏 그 장신구를 그리도 갖고 싶어 했나 보다. 참말로 그랬다. 신희는 공부도 잘하고 예쁜 아이였다. 그 애는 잘 빗은 머리에다 도투락댕기를 드리고 다녔다. 설령, 그 애가 맘을 열어준다 해도, 같은 '윤가尹哥'였으니 아니 될 일, 심술이 나면 그 애의 도투락 댕기를 잡아당기고 달아나곤 했다. 참말로 그랬다. 누님은 키가 나직하고 눈이 예뻤다. 누님은 길게 땋은 머리끝에 헝겊 댕기를 드리곤 했다. 설혹, 누님이 나이를 탓하지 않고 맘을 열어준다 해도, 사촌지간이었으니 이 또한 아니 되는 일. 물동이를 이고 가는 누님의 댕기를 건드리고 달아나곤 했다. 참말로 그랬다. 국어선생님은 분필 잡은 손이 오동통 예쁘고 연지 바른 입술이 고왔다. 선생님은 물기 촉촉한 짧은 머리에다 꽃무늬 핀을 꽂고 다녔다. 설약, 선생님이 맘을 열어준다 해도, 사제지간이었으니 이 또한 아니 될 일. 꽃무늬 핀만 바라보곤 했다. 참말로 그랬다. 그녀는 늘 하회탈 같은 눈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긴 생머리에다 왕나비 머리핀을 꽂고 다녔다. 누나와 동생으로만 지내자던 약속. 나는 제법 잘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누나' 말고 '자기' 하자고 졸랐다. 그러나 아니 될 일. 나는 생계를 꾸릴 재주가 없는 대학 1학년생. 왕나비 머리핀을 뽑고 싶었는데... .
시간이 훨씬 지난 다음, 나는 여성의 머리핀을 더 이상 남의 눈치 아니 보고 뽑을 수 있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처가에 갔다. 집안 식구들과 아내의 친구들이 몰려와서 한 턱 내라고 어찌나 조르던지.
"윤 서방, 댕기풀이를 해야지."
무슨 영문인지, 빙모님은 푸짐한 상을 대신 내어 놓았다. 참말로 그랬다. 댕기풀이라고 했다. 홀로 앉은 이 밤, 그 의미를 되새기며 환상에 젖는다. 댕기풀이는 댕기를 푸는 일. 촛불이나 호롱불을 '후우' 불어 끄고서야 하는 일. 이웃 아낙네들이 몰려와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 문창호지를 뚫고 훔쳐 보는 일. 땋은 머리를 올올 풀어 쓰다듬는 일. 한 번 푼 사람은 요 다음부터 상투를 틀어 동곳을 꽂고, 한 번 풀린 사람은 요 다음부터 쪽머리를 하여 비녀를 꽂게 하는 일. 댕기풀이란, 곱게 싼 남의 가문 선물포장을 떨리는 손으로 끄르는 일. 이어서, 리본을 풀고 속포장마저도 끄르는 일. 댕기풀이는 남의 가문의 시치미를 떼는 일, 무장을 해제하는 일. 조급증이 나더라도 라르기시모(larghissimo)'로만 악기를 시연試演해야 하는 일. 아, 그리고 댕기풀이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일.
문득, 딸아이가 그립다. 녀석은 앙증맞은 머리핀을 꽂고 있으리라. 뒷날 어떤 녀석이 다음과 같이 고백해 온다면 순순히 딸을 내어줄는지 모르겠다.
"아버님, 저는 풀밭에서 따님의 머리핀을 조심스레 풀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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