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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갈대를 바라보다가 / 윤요셉

갈대를 바라보다가 / 윤요셉


 

 

똑 같은 사물임에도, 보는 이에 따라,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그 쓰임에 따라 천 갈래 만 갈래 그 가치가 달라지는 법이다.

갈대만 하여도 그렇다. 개여울이 내 만돌이 농원을 휘감고 흘러간다. 이 개여울은 경산시 지정등산로이며 명산(名山)으로 알려진 선의산(仙義山)’에서 발원(發源)하여 사계절 마르지 않고 흐른다. 이 가을, 개여울엔 갈대꽃이 한창이다. 갈대꽃은 내가 농장에 아침저녁 드나들 때마다, 무수한 손들을 자꾸 흔들어 댄다. 그것은 흡사 하얀 장갑을 낀 연인의 손 같다. 아니, 군중이 환호의 손을 마구 흔들어대는 것 같다. 한낱 농부에 지나지 않은 내가 갈대꽃으로 하여 VIP 대접을 받는듯하여 마냥 행복해진다.

그러한 갈대한테도 이런저런 사연이 없었던 건 아니다. 우리 내외가 이곳 농토를 산 이후 몇 해 동안은 개울의 갈대를 성가신 존재로만 알았다. 해서, 틈만 나면 낫으로 베내거나 뿌리째 뽑아 내던져버리거나 하였다. 물론 겨울에는 불을 놓아 말끔하게 없애보려고도 하였다. 그런데도 얼마나 생명력이 질긴지, 해가 거듭될수록 그 개체는 늘어나 숫제 개울을 다 차지하곤 하였다. 살펴본즉, 물속에다 땅속줄기를 길게 내어놓고, 그 땅속줄기 중간 중간에다 수염뿌리를 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조약돌을 집어 들고 물수제비를 뜨던 기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수경재배를 하는 채소의 뿌리 같기도 하였다. 그러한 구조로 말미암아 설령 홍수가 나서 그 땅속줄기가 군데군데 끊어지더라도, 오히려 새로운 개체로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다가 종자가 관모(冠毛)’라는 특수한 구조로 되어 있어 멀리 날아감으로써 번식력이 뛰어나다는 게 아닌가.

내 농장에 찾아 드는 이들은 한마디씩 거들곤 하였다.

여보게, 도대체 개울이 저게 뭔가? 갈대가 우거져 복숭아밭이며 감밭이며 온 데 그늘을 지우고 있으니.”

하지만, 나는 그 누가 뭐라 해도 더 이상 그 갈대밭을 해칠 턱이 없다. 갈대가 나의 농장에 무척 이롭다는 걸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갈대의 뿌리는 대나무의 뿌리와 마찬가지로 어레미 같이 생겨 물을 잘 걸러주는 데다가, 물속에 녹아 있는 중금속을 정화하는 데도 뛰어나다고 한다. 사실 그러한 점 때문에 일부러 심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뿌리가 견고하고 잎이 무성한 갈대들은 어우러져, 홍수가 내 밭둑을 함부로 넘지 못하도록 하더라는 걸 똑똑히 보았다. 나아가서, 홍수가 하천바닥을 싹싹 쓸어가는 것도 막아주곤 하였다. 요컨대, 나는 그 이점을 알기에 개여울의 갈대를 보호하고 있다.

여름날, 이웃마을 OO’는 경운기를 몰고 종종 내 개울로 오곤 한다. 그는 소를 여러 마리 먹이고 있는데, 우거진 갈대가 좋은 소꼴이 되며 금세 한 경운기를 벨 수 있음을 알고서 그렇게 오곤 한다. 마음 같아서는 손대지 말라하고 싶지만, 친구지간인지라 그저 못 본 체 한다. 사실 내 어린 날엔 강가에 소와 염소를 몰고 가서 진종일 풀어놓는 이들이 많았다. 우리 또한 그렇게 하였다. 그곳엔 갈대밭이 대단하였다. 그러한데 언제부터인가 수원지 보호니 환경보호니 하며 방목 또는 방사(放飼)를 금하고 있다. 하여튼, 갈대는 좋은 먹잇감이다.

갈대꽃을 바라보노라니, 내 아버지에 대한 추억 아니 떠올릴 수가 없다. 당신은 시기적으로 지금보다 조금 이른 때에 갈대와 더불어 억새를 베어오곤 하였다. 그것들은 좋은 빗자루 감이었다. 수숫대는 부엌 빗자루, 마당 빗자루로 만들고, 갈대와 억새는 방 빗자루로 만들었다. 당신은 그것을 이삐(잇비)’라고 하였다. 위에서 말한 관모가 떨어지거나 보풀이 이는 걸 사전에 막기 위해, 곱게 만든 갈대꽃 빗자루나 억새꽃 빗자루를 소금물에 데치곤 했다. 그러면 놀랍게도 보풀 등이 덜 빠졌다. 기왕지사 억새이야기도 꺼냈으니, 마저 더듬고 넘어가자. 갈대와 억새를 식별하라면, 꽤 어렵다. 그러나 개울이나 늪에 자라면 갈대이고, 산이나 들에 자라면 억새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나의 애독자님들께 덤으로 드린다. ‘갈대[]처럼 생겨 먹은 갈이란 뜻을 지녔고, ‘억새는 그 성질이 억세어서에서 붙여진 식물이름이라고 익혀두면 된다. 마치 질경이질긴 풀이란 뜻을 지녔듯. 사실 살아생전 내 아버지는 갈대를 빗자루 재료로만 쓴 게 아니다. 그걸로 발[]을 엮기도 하였다. 내 아버지는 그렇게 한 적 없지만, 수 세기 동안 말린 갈대 줄기로 지붕을 인 적이 있고, 바구니 세공과 화살대로도 쓰였단다. 심지어 갈대 줄기를 묶어 배[船舶]를 건조하기도 했단다.

갈대가 가수 박일남에 이르면, ‘갈대의 순정이 된다. ‘사나이 우는 마음 그 누가 알랴/(중략) 바람에 흔들이는 갈대의 순정//’그 가수는 사랑에 빠진 남정네의 마음을 갈대에 비유했지만, 변덕스런 여자의 마음을 갈대와 같다고 관용적으로 표현하는 게 통례다. 청년기에 나는 어느 숙녀로부터 우스갯소리를 들은 바 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들 하지만, 그 뿌리만은 튼튼한 걸요.”

그 말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갈대의 줄기는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있다. 그러나 그 줄기가 바람에 일렁대는 것은, 속 빔탓만은 아니란다. 줄기에 비해 잎이 워낙 무성하기에 한 쪽으로 쏠릴 따름이라지 않은가.

갈대가 파스칼에 이르면, ‘생각하는 갈대가 된다. 그는 <<팡세>>에서 그러한 표현을 했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 가장 연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지만.’의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사실 그는 성경에서 그러한 말을 따왔다고 알려져 있다. 마태오복음서 1218절에서 22절까지에, 이사야서 421절에서 4절까지에 이미 유사한 구절이 있다. 흔히들 상한 갈대라고 이르는 부분이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내가 아주 엉뚱하게 상상컨대, 파스칼은 평소 집필할 적에 그 어느 필기구도 아닌 펜을 썼지 않았겠나 싶다. 그가 잡고 있었던 펜은 그 무엇도 아닌 갈대줄기였을 것 같고. 그는 위 성경구절과 더불어 자신이 거머잡은갈대펜에서 영감을 얻은 게 아닐까 하고서.

갈대가 오보에, 바순, 클라리넷 등 리드(reed) 악기연주자에 가면, 바로 리드가 된다. 우리는 퉁소 따위에 꽂는 그 리드를 라고 불렀다. 쉽게 말해, 떨림판이다. 정말로, 리드 악기의 리드는 갈대에서 얻는다고 한다. 오보에와 바순은 두 장의 리드 즉, 더블리드를 쓰고, 클라리넷은 한 장의 리드 곧, 싱글리드를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이들 리드 가운데 오보에 리드에 관해, 즐겨 듣는 F.M.방송을 통해 흥미롭게 소개받은 바 있다. 오보에는 가장 고통스런 악기로 일컬어진단다. 오보에 연주자들은 오보에 연주 자체보다도 리드를 손수 깎는 데 바치는 시간과 정열이 더 많다는 사실. 모두 수작업으로 하되, 한 곡 연주를 끝낸 다음엔 다시 새 리드로 바꿔 끼운다고 한다. 리드 악기들 리드 가운데 가장 작고 예민하여 리드 수명이 짧아서 그런 일이 생긴단다. 물론 오보에가 서양악기이니 그 리드에 쓰이는 갈대도 전량 수입해 온다고 했다. 전 세계에 4()의 갈대 종류가 있다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뽑혀서 올 터. 미세한 떨림만이 오보에 리드의 생명이라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오보에 연주곡, ‘가브리엘 오보에(넬라 판타지아)’도 그처럼 지난한 과정을 거쳐 깎은 갈대의 리드에서 나온다니! 오보에에 쓰이는 리드 즉, 갈대가 오케스트라에서 대단한 지위에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기만 하다. 다들 아시다시피, 오케스트라는 부채처럼 연주자 좌석이 펼쳐지는데, 오보에가 한 가운데에 자리한다는 거 아닌가. 그러기에 오보에를 두고, ‘악기 중의 악기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 쉽게 말해,‘Reed’‘Leader’가 된다는 말이렷다. 왜 그런고 하니, 오보에는 그 소리가 주변 악기소리와 섞이지 않고 도드라져서, 오케스트라가 연주에 앞서 시연(試演)할 적에 오보에가 준비 땅!’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갈대에 관해 더 이야기 하자면, 밤을 꼬박 새도 다 못할 것이다. 대학 졸업반일 적에 학과 동기들과 함께 부산의 갈대밭, 을숙도로 졸업여행을 갔다가 너무 술을 많이 마셔서 낙오자가 되었던 일이며, 각 지역 문화 행사 가운데 갈대꽃 축제억새꽃 축제니 하는 일이며, 남의 묵정밭의 억새를 태우다가 119가 긴급 출동한 사건이며 . 그러나 더 이상의 이야기는 접어두더라도, 이 전설만은 꼭 들려주어야겠다.

예전에 동양의 어느 나라에는 토목전문가아닌 토목전문가가 살았고, 그는 어찌어찌 하여 그 나라의 수장(首長)을 맡고 있었다. 그는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혈세로, 토건업자들의 배를 불려 줄 의향이었는지, 그 나라의 주요 강을 마구 파헤쳤다. 그리하여 갈대며 철새 도래지며 문화유적지며 온갖 귀중한 국가 자산을 다 망쳐놓거나 없애버리거나 했다. 그가 한 행위를 두고, 후세사람들은 삽질경영이라고 욕했다. 하지만, 그가 그 나라 수장으로 있을 적에 많은 딸랑이들은 뒷감당 아랑곳 않고 마냥 옳소! 옳소!’하였다. 대한민국의 어느 중견 수필작가는 그의 행위를 이렇게 개탄한다.

자연(自然)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게[]’ 가만히 두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런 짓을 한 그는 생각하는 갈대가 아니라 흔들리는 갈대였다. 아니, ‘부러진 갈대였다. 아니 아니, '부러져 버려진 갈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