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 박성희
참 커다란 손이다. 파도를 비집고 불쑥 솟아나온 손이 허공을 향해 있다. 뭔가를 간절히 구하는 것도 같고, 무형의 그 어떤 것을 떠받치고 있는 것도 같다. 둔탁한 청동의 느낌이 서늘하지만, 손이 주는 친밀감 탓인지 그리 낯설지는 않다. 굵은 핏줄이 선연히 드러나는 손은 금방이라도 맥이 꿈틀거릴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사람의 마음을 풀어놓는 바다와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이 속마음을 담고 있다면, 손은 감출 수 없는 표정을 담고 있다. 하늘을 향한 저 손은 세속의 자잘한 티끌마저 바다에 훌훌 털어버리고 싶다는 절절한 기도를 올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다에만 손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니 또 다른 손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바다에 서 있는 손이 오른손인 반면, 뭍에 서 있는 손은 왼손이다. 손과 손 사이에 서서 양쪽을 번갈아 바라본다. 그 간격이 그리 멀어 보이진 않는다. 세월의 두께가 더하면서 육지가 가라앉아 바다가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 뭍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다 속 풍경 또한 뭍처럼 산과 계곡, 나무와 풀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바다나 뭍이나 그 본질은 매한가지 아니겠는가.
산란한 마음 탓인지 바다에 있는 손과, 뭍에 서 있는 손 모두가 외로워 보인다. 처음엔 한 지체였던 것이 둘로 나뉜듯한 느낌을 준다. 서로를 손짓해 부르는 듯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손바닥 위에 다른 손 하나가 달려와 포개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손과 손을 마주 잡고, 서로의 속내를 풀어 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무언의 가르침을 준다.
그에게로 눈길을 옮긴다. 우두커니 서서, 몸을 뒤척이는 파도를 마주보고 있다. 미동도 없이 오래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그가 마음이 복잡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한솥밥을 먹는 사이가 주는 편안함이 사소한 오해를 불러왔고, 그것이 눈덩이가 되어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만 것이었다. 쉬이 가라앉지 않는 앙금을 걸러내고 싶은 마음으로 바다를 향해 달려왔다. 혼자서 먼 길을 나서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별 수 없이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응어리가 풀리지 않아서인지 몸이 신호를 보내왔다.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바다를 만나러 오는 내내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느라 마른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이마도 축축해졌다. 서로에게 손수건을 내미는 것 외에는 말을 아낀 채 바다 앞에 섰다. 두 팔을 벌려 넓은 바다를 안는다. 갇혀 있던 사람처럼 크게 심호흡도 해본다. 해풍 한 줄기에 천근이었던 머리가 가뿐해지고, 부글거리던 위장도 가라앉는다. 그렇게 바다는 도시에서 묻혀온 검불들을 날려준다.
마음이 잠잠해지니 그의 모습이 더 크게 눈에 들어온다. 어느새 서리가 앉은 머리칼이 듬성듬성하다. 젊은 날 넘치는 자신감으로 다부졌던 어깨는 앞으로 구부정하다. 내가 물이면 그는 불이었다. 물은 불의 성급함을 참지 못하였고, 불은 물의 느긋함을 답답해하였다. 삶이 고단한 날이면 서로가 각을 세웠다. 물을 부어 불을 끄고자 했고, 불로서 물을 말리고자 했다. 그럴 때마다 불과 물은 각자의 색깔을 잃지 않으려고 은근히 힘겨루기를 하곤 하였다. 서로의 진을 빼는 무모한 일임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쌩쌩 바람소리가 날 때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오늘 그 불의 뒷모습을 처음으로 자세히 본다. 활활 타오르던 기개는 간곳없고, 사그라질 듯 불씨만 겨우 부지하고 있다. 꾸밀 수 없는 뒷모습은 정직하다. 그래서 때로는 앞모습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 뒷모습을 바라보자니 마주 볼 때 팽팽하게 당겼던 줄을 슬그머니 놓게 된다. 줄을 다부지게 감아쥐었던 손아귀의 힘도 느슨히 풀고 만다.
바다에 떠 있는 손에서 내 안의 나를 만난다. 내 손을 잡아주기만을 바랐지 단 한 번도 먼저 손을 내민 적은 없었다. 늘 자신의 터진 손끝만 바라보며 투덜거린, 철없는 욕심쟁이였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느릿느릿 흘러온 물임에도 마음이 급해진다. 가만히 다가가서 그의 손을 슬그머니 잡는다. 따뜻하다. 세월이 내려앉아 삭정이처럼 푸석거렸지만 온기만은 그대로다. 그가 뜨악한 표정으로 돌아본다. 돌처럼 굳어 있던 얼굴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한다. 어색한 미소와 함께 파삭한 내 손을 마주 잡아 준다. 젊은 날에도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는 것을 쑥스러워하던 그가 큰 용기를 낸 샘이다. 늘 팽팽하게 마주보았지만 오늘은 같은 방향을 향해 서 있다. 언덕만한 파도가 우리 앞으로 밀려온다. 파도가 높을수록 물은 제 몸 색깔을 버린다. 검은빛에서 푸르게, 희게 엷어진다. 잘게 부서지며 상생의 손을 자꾸만 쓰다듬는다. 서로 먼저 손을 내밀어라 당부하며 알뜰히 손을 씻어준다.
거친 삶의 바다를 건너면서 얼마나 더 부서져야 저렇게 눈부신 흰빛을 낼 수 있을까. 일생 한사람과 질긴 연을 맺어 살아오면서도, 늘 자기 연민에 치우쳐 짝이 디딘 늪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우둔함이 부끄럽다. 차가운 바다에 그의 오른 손이 서 있다. 나의 왼손은 한 때 바다였을지도 모르는 뭍에 붙박이처럼 서 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추워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더운 가슴으로 그의 오른손 위에 내 왼손을 기꺼이 얹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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