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폐선 / 강돈묵

폐선 / 강돈묵


 

 

당신은 혼자서 방파제 위에 덩그러니 앉아 궁상을 떨고 있네요. 당신이 있어야 할 장소는 분명 저 물 위인데, 엉뚱한 곳에 나와 볼썽사나운 꼴을 하고 있어요. 바닷가를 거니는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가로 놓인 그 모습이 보기에도 흉하기 그지없어요. 마치 빈 공원에서 겸연쩍은 일을 한 노인네가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 모습과 나무도 닮아 있어요. 그냥 옆에서 바라보기에도 그렇고, 도와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면하기도 안쓰러운 거 있잖아요. 당신을 보는 순간 그런 기분이었어요.

윤기 나던 피부는 허물까지 벗어졌네요. 얼룩진 옆구리는 부종을 않는 아픔을 감추지 못하네요. 바닷바람이 불 때마다 저리 을씨년스러우니 아침저녁의 찬바람은 어찌 견디는지요? 난데없이 찾아드는 지난 세월의 삶이 한없이 그립겠어요. 처음 내가 저쪽 먼 데서 당신을 발견했을 때는 노을 지던 저녁 무렵이었지요. 내 눈에 비치 당신은 방파제 너머 너울거리는 파도와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처럼 느껴졌어요. 방파제 너머 수면에 떠 있는 줄 알았거든요. 가까이 오면서 방파제 위로 밀려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무언지 모르는 비애감이 물려오데요.

당신은 갯벌 특유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어요. 뭐라 할까. 소금기라기보다는 미역이 썩는 냄새 아니에요. 이생의 삶을 마친 게의 주검에서 나는 냄새 같은 거였어요. 우리 집 누렁이가 마지막 생을 접던 날의 모습이 당신에게도 있었어요. 천식을 앓다가 가신 분의 숨소리도 들렸고요. 참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초라한 눈빛으로 저쪽 바다를 바라보던 당신의 모습이 나를 놓아 주지 않아요. 당신의 눈이 떠나지 못하는 그곳에는 어선 한 척이 있네요. 해사한 볕에 유난히 빛나는 새 옷을 입었어요. 아마 최근에 유행하는 패션인 거 같아요. 치장도 치장이지만 그 기개가 당당해요. 뱃고동소리도 우렁차요. 어쩌면 만선을 하고 돌아오는 배일지도 몰라요. 왜 당신은 그 어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거예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 어선에 정신을 놓고 있는 당신의 모습은 어둠이 내려도 그대로일 것 같네요.

무엇인가 할 말이 많으신가요. 내 발목을 잡고 무언가를 자꾸 뇌는 것 같아요. 당신이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에 대한 이야긴가요? 제가 학창시절에 여객선을 타고 여행한 적이 있어요. 그 배는 남해안의 여러 조그만 섬을 순환하는 배였어요. 옆자리에는 아주 나이가 많으신 어른이 계셨어요. 그분은 한참 나를 훑어보시더니 말문을 여셨어요. 그 이야기는 내가 배에서 내릴 때까지 계속되었어요. 배의 엔진소리가 심하여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분은 목소리 조절을 비교적 잘 하셨어요. 대부분 지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더러는 훈계의 말씀도 곁들여서 내가 손자가 된 기분으로 들었고요. 아마 내가 방황하고 있는 젊은이로 보였던 모양이에요. 젊은 날의 사랑과 방황을 이야기하실 때는 침까지 튕기며 열성적이셨거든요. 조금은 부끄러운 이야기도 들어 있었고요.

내가 배에서 내리려고 허리 굽혀 인사를 하자 그분은 당당하게 살아하며 내 손을 잡아 주셨어요. 이물에서 발을 내려놓자마자 고동소리를 내며 여객선은 다음 섬을 향해 떠났어요. 부웅, 부울 하면서.

학창시절에 만난 그분처럼 당신도 내게 그런 말씀하시려는 거지요? 방파제 위로 밀려난 당신의 모습으로는 전혀 믿기지 않는 젊은 날의 이야기 말이에요.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거친 파도도 이겨냈던 당신의 모습이 상상되네요. 당신이 돌아오는 날엔 항구의 갈매기들이 모두 나와 환영했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여정에 지친 영혼이 어쩌다 찾아와 당신의 어깨에 앉을 뿐이지요.

분명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 이른 새벽 먼동이 트기도 전에 정박해 있던 몸을 이끌고 망망대해로 내달았을 거예요. 언제나 만선의 꿈을 싣고 나섰겠지요. 아침노을을 해쳐 나가는 당신의 출항에는 언제나 갈매기들의 행렬이 따랐겠지요. 그 갈매기의 날갯짓은 당신의 고동소리에서 힘을 얻었을 거고요. 참 보기가 좋았을 것 같네요. 내닫는 당신 앞에 부서지는 햇볕이 파문 위로 골 지어 밀려갔겠지요.

당신의 젊었을 때 모습이 그려져요. 바닷물이 아무리 심술을 부려도 당신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미 바다의 속내를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비위만 건드리지 않으면 저러다 말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겠지요. 물론 광기를 물고 달려드는 성난 파도라면 눈치 빠르게 자리를 내주고 돌아왔을 거고요. 괜히 호기를 부리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을 살아오면서 터득하셨겠지요.

터득한 진리를 후배들에게 전하려 해도 아무도 당신 앞에 와 주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살아가기에 바빠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지요.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말아요. 당신도 젊어서 그랬잖아요.

당신이 삶의 지혜를 터득했어도 점차 힘이 빠져 쇠락해가는 몸에는 도리가 없었을 거예요. 또 세월이 흐르면서 자주 몸에 병이 붙는다는 사실도 알았을 거고요. 더러는 병원에 들러 치료도 받았지요. 그때마다 처방은 되었으나 몸은 젊었을 때로 돌아가지 못함은 어쩔 수 없어요. 제대로 구실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투정 부리는 주인의 말에 많이도 서운했지요? 그래도 평생을 동고동락한 주인밖에 없어요. 여기저기 쑤시는 삭신을 어쩌지 못해 하는 당신을 보고 챙겨서 방파제 위로 끌어올려 준 것은 역시 주인이잖아요. 그대로 물에 있었더라면 지금쯤은 바다 밑 시궁창에 수장되었을지 몰라요.

지금 당신을 바라보고 있어요. 앞으로 당신에게 닥쳐올 일들이 걱정이에요. 이제 어디로 밀려가게 될까? 어쩌겠어요. 이제 다 순환인걸요. 서글퍼도 어쩌겠어요. 이젠 떠날 준비를 해야지요.

오늘따라 볕이 따사롭네요. 찬바람이 아니니 다행이지요. 우리도 어디선가 다신 만날 날이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