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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영종(靈鐘) /김희자

영종(靈鐘) /김희자  

 

 

 

구드레나루터에서 돛배를 탔다. 백마강 물길 따라 백제의 길을 더듬는다. 유월의 산야는 초록 전에 덮여 흙빛조차 찾아볼 수 없다. 세상이 온통 초록빛이니 강물 또한 짙푸르다. 말없이 흐르는 돛배가 시간을 거슬러 세월 저편으로 흘러간다. 백제의 슬픈 역사가 서린 곳, 세월을 거슬러 흘러가니 절벽을 이룬 낙화암이 강을 내려다보고 섰다. 절벽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직접 썼다는 글귀가 선명하다. 낙화암이라는 붉은 글씨가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백마강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패망한 나라의 역사와 꽃다운 여인들의 혼이 깃들어 있다.

제국의 꿈이 사라진 땅 부여, 백제 여인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는 낙화암이다. 아픈 전설조차 세월 속으로 흘러 보낸 듯 유월의 백마강은 푸르기만 하다. 강물 위에 버티고 선 절벽에서 붉은 울음이 떨어진다. 슬픈 기운이 목젖을 타고 가슴 한 복판을 지나간다. 붉은 것들은 슬픔이 깊다. 강물 따라 유유히 흐르던 돛배가 고란사 입구에서 닻을 내렸다. 낙화암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고란사에서 멈추었다. 벼랑에 선 작은 절집도 온통 푸른 잎으로 싸여 있다.

고란사는 옛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는 곳이다. 삼천궁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아담한 절집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고요만 머문다. 절집에는 으레 풍경 하나 있기 마련. 허공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는 풍경이 묵언에 들어있다. 하늘과 강, 과거와 현세 사이에서 아픔을 품고 있는 풍경은 이곳밖에 없으리라. 세월을 사이에 둔 풍경은 아무런 말이 없다. 고요의 한 끝에서 나는 무언의 소리를 만난다. 묵언의 경지에 든 풍경이 우리네 인생도 저처럼 말없이 살라고 일러준다. 법당에서 새어나온 향내가 실바람에 실려 강으로 흩어진다.

백제 여인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달았다는 영종靈鐘앞에 섰다. 세월의 강을 건너온 이야기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지난 시간이 아우성치며 달려드는 것 같다. 풀잎 끝에 손가락을 베이듯 마음이 쓰라리다. 영종이 달린 종각 앞에서 무언의 울림을 듣는다. 그 울림의 깊이는 패망한 나라의 역사르 떠올리게 한다. 멸한 나라, 임을 잃은 서러움은 여인들에게도 비켜가지 않았다.

자기 소멸의 비극 앞에서 절개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 나당 연합군에게 쫓기자 절벽에서 몸을 날려 강으로 뛰어내렸던 여인들이다. 나라가 멸망함에 목숨을 던진 여인들, 어찌 궁녀뿐이었을까? 그 중에는 소박한 백제 여인들도 있었으리라. 죽음으로 백제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종을 달았다고 하니 그 울림과 깊이를 어찌 가늠할 수 있으랴.

이 영종은 백제의 범종을 홍사준의 고증에 따라 부여 고란사에 달았다. 파장 음이 길어 반경 삼십 리까지 들리도록 만들어진 종이다. 또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용두와 비파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선녀를 연상케 하는 그림이다.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히징 않으려고 백마강에 몸을 던진 백제 여인들의 영혼을 위안하기 위해 마련한 청동종이니 그 종소리는 영묘할 수밖에 없으리라. 영혼들을 달래는 종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 아련하다.

신령스럽고 기묘한 영종소리를 들어보고 싶었지만 욕심을 접고 낙화암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이게 어인 행운인가? 염원하던 종소리가 등 위에서 울러 퍼진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단 한 번의 영종소리였지만 길게 멀리 퍼져 나간다. 숲을 오르며 가두어 놓았던 귀를 씻는다. 삼십 리나 울려 퍼진다는 영종소리제 속의 것 모두를 쏟아내는 듯 울림이 깊다. 그 슬픈 역사의 깊이는 저 영종의 울림 속에 깃들어 있다.

그 울림은 백마강을 건너고 세월의 강을 건너 현세까지 이어진다. 한 나라의 역사를 종소리에서 느껴본다. 누구에게나 저 종소리처럼 울부짖고 싶은 시간들이 있을 것이다. 길 위에서 종소리를 들으면 문득 영원에 대한 감각이 깨어난다. 시인 '존 던'의 말을 흉내 내자면 현생의 순간순간은 영원의 한 조각일 뿐이다. 존재란 부여되는 의미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지만 물거품처럼 사라진 지난날들은 무엇을 위해 준비되었던가? 간절한 소망은 끝내 이루어진다고 하더니 나는 산길을 오르며 영종소리를 들었다. 등 뒤를 따라오던 깊숙한 종소리가 낙화암 절벽 위에 와 머문다.

이름만 가슴에 두어도 슬픈 낙화암落花岩이다. 백제의 사직이 무너지는 날, 여인들이 적군에게 잡혀 치욕스런 삶을 이어가지 보다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백마강에 몸을 던졌던 곳이다. 그 모습을 꽃이 날리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니 그들은 분명 꽃이었으리라. 백화정은 그 자체로 바위에 피어난 꽃 같았다. 낙화암에서 강을 내려다보고 섰다. 꽃 지는 소리가 귓전에 들려온다. 아프게 사라진 것들은 이렇게 오래도록 흔적을 남긴다.

사라져간 제국의 흔적을 뒤로하며 언덕을 내려선다. 귓전에 젖은 종소리가 채 마르지 않았다. 소리에도 혼이 담겨있는 법. 영종의 울림이 얼마나 깊이 박혔는지 긴 여운을 남긴다. 진득한 깊이에서 나오는 여운은 백제 여인들의 영혼을 달래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언덕을 타고 오른 강 기운이 한 줄기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의 입질에 마음이 걸려든 나는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돌계단을 내려서는 내 발자국마다 붉은 꽃이 피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