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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공룡 편의점 / 심선경

공룡 편의점 / 심선경


 

 

엄마, 난 대학 안 갈래.”

둘째 아이가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순간, 내 속에선 분명 심장이 하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마터면 음료수 병을 놓쳐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어릴 때부터 워낙 돌발적인 행동을 많이 해왔기에 늘 촉을 세우고 있긴 했었지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다.

요즘은 명문대학 나와 봐야 별 볼 일 없으니 그냥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했지만, 솔직히 마음 속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자식이 좋은 대학을 나와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길 바라는 것은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엄마의 잦은 이직에, 울며 겨자 먹기로 부모 곁을 떠나 중학교부터 타국에서 혼자 공부해야만 했던 아이는 항상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부모 없이 지낸 시간이 오래여서 어떤 문제가 생겨도 혼자 해결하려는 노력만은 가상했다.

둘이 가까운 공원을 산책하다 목이 말라 근처 편의점에 들렀었다. 거기서 딸아이는 폭탄 발언을 한 것이다.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놀란 가슴을 억누르며, 왜 대학을 가지 않으려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아이의 대답은 단호했다. 자신은 편의점에 진열된 물건이 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대학과 편의점이 뭔 상관이냐며 핀잔을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적어도 내가 믿는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부모 입장에서의 조언을 늘어놓을 준비를 단단히 했다. 하지만 아이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준비해 둔 내 속의 생각들은 이미 고려장 시대에 함께 묻혀했어야 할 낡은 유산에 불과했다. 아직 어린 줄만 알았는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신중하고 진지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정해진 답을 요구하는 시험을 치르느라 그 아까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것이 너무 아깝다고 했다. 이유를 생각하지도 않고 이렇게 끝도 없이 이미 기성세대들이 정해 놓은 답을 쫓아가기 위해 친구들과 경쟁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했다. 누구나 똑같이 대학교를 나와야 하고 남들이 하는 대로 기본적인 것은 다 배워서 비슷한 조건을 맞춰나가는 것은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과 다를 바 없다는 논리였다.

모두가 하는 대로 똑같이 우리들은 그 전철을 밟아온 게 사실이다. 최소한 인간답게 살기 위해, 보편적으로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그럴듯한 직업을 얻기 위해, 우린 끝없이 공부를 했고 남과의 경쟁에 휘둘렸었다. 어쩌면 이 시회는 아주 지능적으로 우리들을 고정적인 틀에 맞추어 살도록 강요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편의점에 들어서면 일반 마트와는 다른 몇 가지가 느껴진다. 아주 간결한 대화로 매매가 이뤄지는 손님과 알바생, 그리고 상품들이 일렬종대로 정갈하게 잘 정리된 모습은 아무렇게나 매대에 내팽개쳐져 있는 다른 가게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더군다나 그곳은 우편 택배를 보낼 수도 있고 축소된 은행의 기능도 누리며 최근엔 치안, 북지센터의 기능을 넘어 긴급한 의료센터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24시간 열려 있다는 강점을 이용해 전국 구석구석에서 다양한 형태로 그 입지를 넓혀나가고 있는 거대한 공룡의 집. 편의점의 온갖 혜택과 안락함에 길들여진 우리는 일회용품의 위험성과 휴식 없는 소비문화를 자각하지 못한 채, 오늘도 그곳이 내 집인 양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힘든 경쟁에서 친구를 제치고 대학에 들어간 많은 학생들이 한 번씩은 해 본다는 편의점 알바. 이곳 편의점도 방학을 맞아 단기 알바를 하는 대학생이 가게를 지키고 있는 듯한데 그냥 정해진 규칙에 따라 오는 고객을 맞이하고, 물건이 빠져나간 진열대에 다시 상품을 끼워 넣고, 바코드를 찍어서 계산하는 일들이 주로 하는 일들이다. 업무 난이도가 그다지 높아보이지는 않는다. 가끔 현금이 많은 편의점을 털려고 잠입하는 강도들로 곤욕을 치루는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너 군데 입사시험을 치룬 뒤 합격 통보를 기다리던 동안, 전선 공장에서 일해 본 적이 있다. 그 일리란 것이 하루 종일 기계에서 찍어낸 전선 케이블을 정리하는 일인데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골병이 들어 결국 보름도 못되어 뛰쳐나오고 말았다. 보수가 적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에 멍해졌고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의아했다. 더 길게 이 일을 하다가는 정말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때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다면 돈이 중요하다지만 돈은 이렇게 벌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창의성을 배제당하고, 어떤 보람도 느끼지 못한 일자리는 아무리 많은 보수가 주어진다 해도 행복하지 않았다.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틀인 이 사회는 젊은이들의 창의적인 생각보다는 정해진 답을 가장 빠르게 찾아내는 사람을 원하고, 그 틀에서 벗어난 사람은 달가워하지 않는 듯하다. 편의점 진열대에서 문건 하나가 팔려나가듯 한 사람이 소비되면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고, 모두 정해진 규칙대로 똑같은 일을 해나간다. 모두가 불안정한 인생에서 앞사람이 걸어온 탄탄한 길을 거기서 정답을 찾고자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면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기 때문일 게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나은 스펙이 필요하고, 좀 이름 있는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에 취업하지 못하면 공무원 시험 합격이 보증수표다.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딸아이의 주장은 그저 공부하기 싫어서, 남들과 경쟁하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누구나 가지 않는 길이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그 분야에만 집중하고 싶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굳이 비싼 등록금을 지불하며 배우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기에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비겁하지만 아직도 남들이 가는 길을 그대로 답습하기를 바라는 엄마의 걱정과 달리 딸아이의 신념은 확고했다. 잘 산다는 것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아가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해 내가, 딸아이의 말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진다.

모든 사람이 제각각의 상품으로 진열되어 있는 거대한 편의점 같은 우리들의 사회. 그곳에서 인기 있는 제품은 불티나게 팔리지만, 인기가 없는 제품은 재고로 쌓여가다 기한이 지나면 결국 폐기처분되는 서글픈 현실.

그것이 싫어 재빨리 거대한 공룡 편의점을 나온 딸아이는 지신을 넘어서기 위한 차갑고도 완고한 뜀틀 앞에 서 있다. 삶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놓고 혹시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뒤에서 지켜보는 외부의 시선들이 몹시 부담스럽겠지만, 나는 딸아이가 자신감을 갖고 저 뜸틀을 무사히 뛰어넘어 누구보다 멋진 포즈로 세상에 당당히 착지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