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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목포의 눈물 / 배재록

목포의 눈물 / 배재록  

 

 

 

애간장을 녹이며 가슴 조이는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뭇 백성의 가슴을 울리고 돌고 돌아 불러지는 유행가이다. 나라를 잃은 민족의 슬픔과 울화를 달래준 애국의 노래이다. 그 노래의 안태고향 목포 유달산에서 노래를 듣는다.

목포는 외나무다리처럼 길고 가늘게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목포의 상징 유달산은 노령산맥이 끝나는 땅 끝 봉우리다, 유달산에까지 뻗어 온 길고 긴 다리를 바다에 담그고 심해의 정기를 산으로 끌어당긴다. 신선이 춤을 추는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이다.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영혼이 거쳐 간다는 유달산 중턱에 목포의 눈물노래비가 있다.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노래비다. 엉덩이가 덩실덩실 하도록 그 노래가 유달산에 울러 퍼진다.

관광을 온 할머니들이 추억의 노래에 따라 춤을 춘다. 그 시절 애창했던 곡조에 맞추어 추는 할머니들의 춤사위에는 한이 어려 있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듯 구슬픔이 당겨 온다.

82년 전에 세상에 나온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불후의 명곡으로 찬사를 받고 있는 노래다. 오직 낮은 자세를 견지하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낮춤으로써 노래 맛은 깊어지고, 애창으로 국민의 가슴을 위로 해준 위대한 노래다. 곡이 너무 애잔하고, 이별의 아픔과 서러움을 고즈넉이 드러낸다. 노래도 목포를 닮고 싶을 때가 있어 유명한 지명은 죄다 가사 안에 담았다.

삼학도, 영산강, 노적봉, 유달산의 이름이 단골로 불러진다. 이름만 들어도 노랫말의 지명들이 실루엣으로 스쳐 간다.

영웅호걸 이순신 동상이 떡하니 노래비를 지켜준다. 금방이라도 걸어 나와 역사 앞에 얄미운 짓을 하고 있는 일본을 그때처럼 혼내 줄 태세다. 복식과 자세가 다른 동상들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타 지역에 위치한 충무공 이순신 동상들은 전통복식이 아닌 다른 복식을 입고 있지만 유달산 이순신 동상은 전통의상을 입었다.

동상이 서 있는 자세도 다른 동상과 달리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고, 몸이 왼편으로 기울어져 있다. 목포바다를 응시하고 있음을 상징하기 위해 동상을 비스듬한 자세로 만들었다 한다.

노적봉을 큰 바위 얼굴이라고도 부른다. 목포를 수호하고 있는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이 환생을 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높이 60m 바위다. 장군이 108일 동안 목포를 지킬 때 짚 마름으로 노적봉을 덮어 군량미를 쌓아 둔 노적가리로 보이게 위장을 했다. 군사가 많아 보여 왜군침입을 제지 했다는 전술이 전해 오고 있다. 또 영산강에 백토가루를 뿌려 바다로 흘러가는 물줄기가 쌀뜨물로 보이게 하여 외적들에게 아군의 군세를 위장하여 후퇴하게 했다고 한다.

노래비 근처에 연리지 소나무가 신비롭게 노래비를 지킨다. 능력대로 자란 두 그루의 소나무줄기가 하늘을 향해 길게 뻗어 너울대기 시작한다. 가지는 무용수가 무희를 하듯이 춤을 춘다. 잎은 건반이고 바람은 연주가다. 푸른색 악보를 꺼내들고 낮은음 높은음자리 접붙여 부르는 목포의 눈물합창소리가 공명이 되어 들려온다.

탄생 한 세기를 맞은 가수 이난영은 사연도 우여곡절도 많았으리라. 16세 나이에 순회공연 중이던 가극단의 막간무대에서 즉석 노래 한곡을 불렀는데 순회 악단원이 된 것이다.

레코드 사장의의 도움으로 가수가 된 것은 가수로의 운명이었다. 그 시대상황과 딱 맞아떨어진 목소리였으며 아무나 흉내 내거나 따라할 수 없는 그런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을 한 시대를 풍미하게 한 가수로서 대성공을 하게 했다. 이 노래로 자신은 물론 고향 목포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20세에 음악가 김해송과 결혼 했다. 6.25전쟁의 참화에 휩쓸려 남편이 납북 된 아픔도 겪었다. 다시 사랑에 빠졌던 동료가수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슬픔을 다시 맞기도 했다.

가난과 시대의 아픔과 함께 한세상을 살아 온 그녀의 삶은 영광과 굴곡의 길이었다. 불운한 말년을 살다가 심장마비로 65세에 운명 했다. 사후 40년 만에 추모 사업단에 의해 고향 삼학도에 돌아 왔다. 대삼학도 배롱나무 아래 수목장으로 묻혀 있다.

이난영 공원이 조성되고 목포의 눈물목포는 항구다노래비도 있다. 하여간 80년이 넘도록 이 땅의 모든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 준 가수였다, ‘목포의 눈물은 그 초심만은 잃지 않은 채 낮은 자세로 민족의 혼과 함께 했다.

이 명곡의 작사자는 문일석, 작곡자는 손목인, 가수는 이난영이다. 노랫말은 와세다대 출신의 20대 무명시인 문일석이 만들었다. 조선일보 노랫말 공모에 응모하여 1등에 당선된 작품이다. 흥행의 귀재로 불렸던 오케레코드의 사장 이철이 제목을 목포의 사랑목포의 눈물로 바꾸었다. 여기에 작곡가 손목인이 곡을 입혀 취입을 해서 세상에 탄생 했다.

국민적 인기를 누려온 목포의 눈물노래를 들다 보면 큰 누님 생각이 난다. 난 오랫동안 누나의 등에 업혀 자랐다. 큰 누나는 이 노래를 참으로 구성지게 잘도 불렀다. 당시 시골에는 라디오가 유일한 매체였는데 그것도 없는 집도 많았다.

산골이라 방송국 안테나가 멀어 주파수 맞추기도 힘들었고 잡음도 많이 나왔었다.

정오 뉴스가 끝나면 라디오 앞에 모여 들어 가요를 청취 했다. 가수의 목소리와 박자를 거의 비슷하게 따라 불렀다.

누나와 친구들은 별이 빛나고 달이 훤하게 밝아 오면 적막한 강가에 모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들을 반복해서 따라 불렀다. 노래를 여러 명이라 따라 부르다 보면 빠르게 익혔다. 2/4박자 라장조, 약간 빠르기 자유로운 형식의 노래인목포의 눈물은 필수 곡이었다.

젓가락 반주는 노래의 흥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며 불렀던 그때의 노래문화는 청년들에게 우정을 도모하고 삶에 활력을 불러 일으켰다. 덕분에 명절 날 개최되는 노래자랑에서는 수준 높은 아마추어 가수가 많이 나왔고 노래수준도 높았다. 특히 목포의 눈물은 가수 이난영의 특유의 비음과 흐느끼는 목소리가 감동이었다. 모창을 하면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노래를 유달리 잘 불렀던 누나가 생각난다.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없이 살았던 그 옛날 나라를 잃은 민족이 일제의 압박에서 자유를 잃고 살아가던 모습을. 희망을 잃어버리고 실의에 젖어 있던 그들에게 구전으로 들려온 애환과 서러움의 노래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노래를 부르는 사공은 내륙에서 필요한 곡류나 소금 등 상품을 싣고 영산강을 오갔다. 바람에 펄럭이는 돛과, 삐걱삐걱 노 젖는 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구성지게 부른 그 노래, 남도의 판소리 가락과 유사한 한이 서려 있는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나주와 무안 거쳐 목포에 도착할 때까지 뱃사공은 그저 조용히 노를 쓰다듬어주며 장단에 맞추어 목포의 눈물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목포에 도착한 사공은 삼학도에 밀려왔다 사라지는 파도를 바라본다. 저 멀리 북항 부두에서 어여쁜 옷깃을 적시며 눈물 닦으며 서러운 이별을 하는 신부를 바라보며 한을 풀 듯 꺾어지는 목청으로 구성지게 노래를 부른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 목포의 설움

영산강의 물줄기는 말없이 제 갈 길로 흘러간다. 망국의 한은 가슴에 맺혀도 사공은 노를 저으며 노래로 민족의 영혼을 일깨워 주었다.

가수의 사명은 노래를 불러 사람들의 기분을 살리는 것이다. 음악 사명은 사람을 흥겹게 하는 것이며, 사람의 도리는 가분과 흥을 살려 즐겁게 사는 것이다. 이 음악에는 민족의 서정이 담겨 있다. 양수가 가득한 자궁이었다. 목포에 정착을 한 목포의 눈물은 민족혼의 양수가 되어 엄청난 위로와 희망을 낳았다.

'호남의 개골' 이라고도 하는 유달산 정상에 섰다. 목포는 초라하지 않고 바다를 닮아서 포근하고 넉넉하다. 목포시립도서관은 120년 전에 문을 연 목포항 덕에 당시 전국 6대 도시였다는 역사를 알려 준다. 러시아, 일본 등 열강들이 무역항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화려했던 무역항의 이력을 가진 목포는 근래에 들어서 공단이 들어서고 조선소가 생기면서 다시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

올망졸망한 섬들을 이어주는 바다는 온통 진주빛 꿈을 꾸고 있다. 무더운 여름날의 낭만을 찾기 위해 시원하고 아름다운 바닷가로 갔다. 시원한 맥주 한 잔에 항구는 화려한 조명으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불을 밝힌 고깃배들이 박수를 치고, 나는 산들산들한 바람을 쐬며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곤히 잠든 어린애의 웃음 같이 다가와 극치를 뽐내며 목포의 눈물한 곡조를 따라 부른다. 목포의 관문이며 학의 날갯짓을 형상화한 목포대교가 엉덩이를 흔든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잇는 총길이 4.12km. 북항과 고하도를 연결하는 다리다.

천연기념물 500호 갓바위의 삿갓이 화려한 야경을 선보이며 유랑의 춤사위를 한다. 서해와 영산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풍화작용과 해식 작용을 받아 만들어진 풍화혈(타포니, tafoni)이다. 자연의 예술 작품은 마치 스님 두 분이 삿갓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경지 높은 스님이 영산강을 건너 나불도에 있는 닭섬으로 건너가려고 잠시 쉬던 자리에 쓰고 있던 삿갓과 지팡이를 놓은 것이 갓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세계 최대의 부유식 바다분수 춤추는 바다분수가 너울댄다. 276대의 분사용 노즐과 96대의 분사용 펌프가 70m 높이로 물줄기를 현란하게 뿜어낸다.

횟집에 세발낙지, 농어, , 민어, 전복, 펄 낙지 등이 허기진 나를 유혹한다. '산해진미'를 선보이며 남도의 맛으로 미각을 감칠 나게 한다. 세발낙지에 소주 한잔을 넣자 속이 데모를 한다. 향긋한 바다냄새가 겹치는 별미다.

대한민국 맛의 수도 목포는 목포의 눈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