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비녀 / 손진숙
미장원에 다녀온 지 한참 되어 머리가 꽤 길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묶고 내 얼굴을 보니 얼핏 어머니의 쪽진 머리를 한 얼굴이 떠오른다. 급하게 일어나 옷장 서랍을 열고 비녀를 찾기 시작한다. 서랍 밑바닥에서 무명천에 싸여 있는 비녀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어루만진다.
비녀는 내 가운뎃손가락보다 한 마디쯤 더 길다. 적당히 자란 콩나물만 한 길이다. 콩나물이 시루에서 물 먹는 소리가 난다. 차차 비녀에 생기가 돌아 음표로 바뀐다. 음표는 아픈 선율이 되어 내 가슴속 기억 한 소절을 불러낸다.
오래전 어느 부활절 즈음의 일이다. 고된 시집살이에 심신이 야위어가던 언니는 종교로 어려움을 극복하려 했던 것 같다. 언니는 온종일 물 한 모급도 마시지 않고 성당에서 기도에만 매달렸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했던가. 기도만 하던 언니에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신 할머니는 살아계신 것으로 보이고, 고생하며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으로 보이더란다.
구미에 살던 언니는 바로 우리 이웃에 전화를 해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요즘과 달리 전화가 있는 집이 드물 때였다. 보리밭을 매고 있던 어머니에게 이웃사람이 그 말을 전했다. 어머니는 뜻밖의 소식에 놀라 호미를 내동댕이치고 집으로 달려왔다. 정신이 아득해져 비녀가 없어진 줄도 모르는 채였다. 당장 비녀를 찾을 수가 없자 마침 눈에 띈 못을 머리에 지르고 허둥지둥, 구미로 달려갔다.
온전치 못한 언니의 눈에는 비녀 대신 대못을 지른 어머니의 모습이 못 박혀 돌아가신 그분이 부활한 모습으로 비쳤을까. 언니는 삶의 근원인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놓쳐버린 정신을 되찾았고, 어머니는 삶의 터전인 밭이랑에서 잃어버린 비녀를 되찾았다. 그때 찾은 비녀가 지금 내 눈앞에서 그리운 음색을 띠고 있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꼭두새벽에 일어나 치렁치렁한 머리를 매만져 비녀를 꽂고 부엌으로 나갔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비녀를 빼 머리맡에 놓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 비녀로 시작되고 마감되는 일상이었다.
그런 어머니에기도 비녀를 지르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외갓집 친척 언니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잔치에 나를 데리고 가는 길에 읍내 미장원에서 파마를 했다. 비녀를 뺀 어머니의 머리에 꽃송이가 피듯 파마송이가 피어났다. 나도 예쁘게 올림머리를 해 주었다. 왜 어린 나의 머리를 특별하게 꾸며 주었는지 알 수가 없다.
올림머리를 한 내 모습을 보고 외가 친척 아저씨가 “시집가도 되겠네.” 라고 하던 말이 아직껏 귓전에 남아 있다. 시집가도 되겠다는 말은 비녀를 꽂아도 되겠다는 뜻이었으리라. 비녀를 꽂는다는 게 아이의 자유로움에서 벗어나 어른의 굴레에 갇힌다는 의미임을 훗날에야 알았다.
뜻하지 않게 닥쳐온 아버지의 병환으로 미장원에 갈 여유를 잃게 된 어머니는 다시 비녀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치료에 쓸 약을 구하러 다니느라 경황이 없었고, 나중에는 아버지가 하던 일을 도맡아 하느라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육 남매를 기르고 가르치는 일로 머리는커녕 옷조차 제대로 갖추어 입지 못했다. 그러다가 늘그막에는 아예 비녀를 지를 수 없었다. 긴 머리를 감아 빗기가 힘들어 짧게 잘라야 해서다. 영영 쓸모없어진 비녀는 장롱 서랍 속에 갇히게 되었다. 그것이 어머니 돌아가신 후, 남기신 물건을 살펴보던 내 눈에 띄었다. 나는 남은 채취라도 맡아보고 싶어 무명천에 곱게 싸서 가져왔다.
어머니는 파마보다 비녀와 함께한 세월이 훨씬 더 길다. 비녀 모양이 대못과 닮아서일까. 아버지와 결혼하여 머리에 비녀를 꽂으면서부터 평온하던 어머니 영혼의 리듬은 흐트러졌다. 숱하게 겪은 시련으로 어머니의 심중 깊숙이 박혀 있던 못이 이제는 내 마음에까지 다다라 여기저기 못질을 하고 있다.
비녀의 머리와 꼬리에는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져 있다. 겨울날 눈 위에 찍힌 새 발자국 같기도 하고, 땅위에 떨어진 꽃잎 같기도 하다. 또 어찌 보면 여름날 후드득 쏟아지는 빗방울 같기도 하고, 가을날 알차게 여문 곡식알 같기도 하다. 아니 뻘뻘 흘린 어머니의 구슬땀 자국 같기도 하다.
거뭇하게 녹슨 비녀를 무명천 위에 놓는다. 한 여자의 일생이 그려진 악보에서 구슬픈 곡조가 흘러나온다. 곡조에 취해 감았던 눈을 떠보니, 푸릇한 옷을 입은 여자가 지친 듯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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