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부탁 / 고재덕
며칠 전 앨범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군대 시절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군 생활의 추억 한 토막이 떠올랐다. 50 여년 전 소위로 임관한 후 첫 부임지가 OO 건설공병단 본부중대였으며, 직위는 부중대장이었다. 부임한 지 일주일째 되는 토요일, 아직 업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조그만 사고가 발생했다. 내무반에서 서지(serge,순모) 바지 하나가 분실되었다는 것이다. 중대장은 바지 도둑을 월요일까지 잡아 놓으라고 명령한 후 퇴근해 버렸다.
부임하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어려운 사건과 부딪혔다. 바지를 훔쳐간 사병이 순순히 자백할리도 없고, 일요일엔 사병들이 외출 가므로 범인을 토요일 중으로 못 잡으면 무능한 장교로 낙인 찍힐 것만 같았다. 한 시간 동안 연병장을 거닐며 골똘히 생각해 보았지만 머릿속 만 요동칠 뿐 뚜렷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면 어떨가 하는 *전단화우(田單火牛)같은 기지(機智)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인간이 심적으로 위축했을 때 충격을 주면 반응이 보이는데 이 원리를 이용하면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방법은 보안이 생명이므로 선임하사에게도 사전에 설명하지 않고 지시를 내렸다. “선임하사! 오랫동안 근무하셨으므로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서 도둑을 찾아주세요.” 그는 밤 11시경 전 소대원에게 완전군장을 시켜 한 시간 반 동안 연병장을 달리게 했다. 하지만 범인은 좀처럼 자수를 하지 않아 선임하사는 범인을 잡지 못해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했다. 그렇다고 그의 기합이 전혀 무모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시도하려는 방법의 전 단계, 즉 심리적으로 위축시켜 준 공이 컸기 때문이다. 소대원들은 영하 10도가 넘는 추운 날씨에 연병장에서 기합을 받았으니 몸은 떨리고 마음도 많이 긴장되어 있었을 것이다.
밤 1시경, 나는 사병들을 전원 내무반에 입실시켜 침상에서 무릎을 꿇게 하고 손을 높이 들도록 지시했다. 만약 눈을 뜨면 범인으로 간주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후 선임 하사에게 눈뜬 사람이 있나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지금부터 내가 여러분들의 앞을 지나가면서 머리에 손을 얹겠으니, 훔친 자는 손을 내린다. 알겠나 !” 동일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명령한 후 모든 소대원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한 바퀴 돌았다. 연병장에서 기합을 받아 심리적으로 매우 긴장되어 있었으므로 바지를 훔쳐간 사병은 몸을 떨면서 손을 내렸다. 다른 동료들에게는 눈치 채지 못하도록 손을 다시 올리게 했다.
상황을 종료하고 소대원들을 취침시킨 후, 그에게는 첫 번째 불침번을 서도록 명령했다. 불침번 신고를 위해 중대장실에 들어온 김 이병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부중대장님, 제가 죽을 죄를 졌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울면서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첫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갔을 때 그의 처제가 서지 바지로 일 바지를 만들면 좋다고 부탁해서 전우의 바지를 훔쳤다고 자백했다. 무심코 뱉은 처제의 철없는 부탁이 선임하사와 부중대장과 중대장을 괴롭히고 전 소대원이 심야에 연대 기합을 받은 냉혹한 시련을 겪게 한다는 사실을 처제는 몰랐을 것이다.
군 형법상 절도는 이적 행위로 간주하여 구속이 원칙이지만 눈물로 참회했으므로 처벌보다는 용서하기로 했다. 부하 사병에게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는 것이 실(失)보다는 득(得)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여 처벌대신 용서를 선택한 것이 뿌듯했다. 그러나 죄는 용서하되 도벽은 반성케 하여 참인간이 되도록 바로 잡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성문을 작성하도록 하여 원본은 내가, 사본은 김 이병이 지니고 다니되, 매일 반성문을 암기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절도 사실이 소대원들에게 알려지면 따돌림이나 가혹 행위 등 인권 침해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심하면 총기 난사를 야기할 수도 있어 보안을 철저히 유지했다. 피엑스에서 장교 쿠폰으로 장교용 서지바지하나를 대신 사서 김 이병에게 주고, 김 이병부터 돌려받은 바지는 도둑맞았던 이 병장에게 반환했다. 바지를 처제에게 전달하기 위해 김 이병을 1주일간 휴가를 보냈다. 김 이병은 영창에 갈 줄 알았는데 휴가 까지 허락해 주니 무척 기뻐서 어찌할 줄 몰랐다. 휴가를 마치고 귀대했다. 정문초소에서 나를 급히 찾는다는 연락이 와서 나가봤더니 김 이병이 호박떡 세 말을 짊어지고 귀대했다. 소대원들은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 채 호박떡을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이 사건을 처리한 후 나는 발령을 받아 근무지를 사령부로 옮겼고, 6 개월후 검열을 위해 그 부대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일병으로 진급해 있었고, 그때까지 반성문을 비닐덮개로 씌워 간직한 채 암기하고 다녔으며, 부대에서 표창장까지 받은 모범병사로 변해 있었다.
50여 년이라는 많은 세월이 흘러간 요즈음, 그는 사회에 나와 군대에서 겪었던 뼈아픈 경험을 바탕으로 성실하고 착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처제도 일 바지를 입었던 추억을 기억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내 마음도 덩달아 흐뭇했다.
*전단화우란 기지(機智)를 써서 소꼬리에 갈댓잎을 묶고 기름을 부어 불을 부친후 燕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했다는 중국 濟나라 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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