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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영자와 고구마 / 정하정

영자와 고구마 / 정하정


 

 

영자는 마루에서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영자야 나왔어.”

먼데서 뭐 하러 와. 배고프제? 저기 뭐 있을 거야. 먹어.”

힘이 없는지 앉으라고 손짓을 하며 모기만 한 소리로 말했다.

네 시간 이상 달려온 길이라 배가 고팠다. 밥상 우를 보니 삶은 지 며칠이 된 듯 한 말라빠진 고구마가 있었다. 그 모양새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더구나 아픈 친구 앞에서 먹을 것에 손이 가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함께 이불을 덮고 누워 영자의 손을 잡았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풀렸다 했다. 그녀의 손에 힘이 빠지면 내가 힘을 주고 그녀가 의식이 깨면 내 손을 꽉 쥐었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영자는 손에 힘이 빠지면서 자꾸 정신을 잃곤 했다. 폐암에 걸린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을 만드는 남편과 함께 래커를 칠하며 산 것이 병의 원인이 되었는지 모른다. 식탁이 보급되면서 상을 잘 쓰지 않자 좀약 포장을 하러 인근 공장에 다녔다. 아무래도 나프탈렌 성분이 더 치명적이지 않았을까 싶지만 무엇이 영자를 병들게 했는지 원인을 규명하지는 못했다. 가난이 죄였을까. 아픈데도 병원에 가보지 못하고 계속 일을 했다. 병원을 찾았을 땐 이미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보험마저 암 진단을 받기 한 단 절 아들의 등록금에 보태기 위해 중도 해지한 상태였다.

영자는 고향을 생각하면 유일하게 떠오르는 친구라고 늘 나를 챙겼다. 내가 결혼하고 첫 번째 마련한 집에 그녀가 남편과 함께 왔었다. 마치 자신이 집을 마련한 듯 좋아하며 내민 것은 두꺼운 포장지에 묶인 네모난 밥상이었다. 우리 가족 네 명이 앉아서 행복하게 먹는 상상을 하며 만들었을 영자의 선물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동안 영자는 아프면서도 오히려 생생한 나를 걱정했다. 치매인 친정어머니를 보살피던 나를 더 안쓰러워하며 위로를 하곤 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자신은 곧 나을 거라고 했다. 나도 믿었다. 그녀의 힘찬 목소리와 치료 중에도 잘 먹는 식성을 보면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긍정적인 생각이 영자로 하여금 많은 날을 버티게 해 준 원동력이었지 싶다.

영자와 함께 이불을 덮고 시간을 보냈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즈음 손을 빼고 일어나니 영자가 눈을 떴다.

영자야 나 갈게. 또 보자.”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밥 먹고 가야지.”

됐어, 그냥 갈게.”

있는 힘을 다해 입 밖으로 밀어내지만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더 이상 영자에게 말을 시킬 수도 없었다.

알았어, 여기 고구마 있네. 이거 먹을게.”

뭐라도 먹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가 될 것만 같았다. 나는 말라비틀어진 고구마를 들고 영자 얼굴 앞에 갖다 대며 말했다.

, 나 먹는다. 이거 먹어.”

꾸역꾸역 울음도 삼키고 고구마를 삼켰다.

영자야, 나 많이 먹었어. 이제 가도 되지? 또 올게, 기다려.”

내가 먹는 것을 봤는지 영자 얼굴이 온화해졌다.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고구마를 계속 입속으로 우겨 넣고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인사를 그렇게 했다.

영자는 생을 놓는 먼 길을 가면서도 겨우 천 리 길 가는 나를 걱정했다. 고향 떠나는 자식처럼 배고플까 봐 배를 채우기를 바랐다. 가난해서 초등학교를 마치지도 못하고 고향을 떠난 영자였다. 그녀에게 먹는다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목표였을 지도 모른다. 손님이 오면 배고프지 않게 먹이고 보내야 한다는 것은 그녀의 철칙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 이 세상 먼저 떠나갈 친구에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고구마를 먹는 일밖에 없었다. 아무런 말도 필요 없이 단지 고구마를 내 입에 넣는 게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떠난 지 5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고구마만 보면 영자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