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 / 강여울
덤은 박카스다. 은근 중독기가 있다. 휴일, 아침에 핸드폰을 들여다 보다 '어머!' 했다. 어느 과일가게 앞 사진인 듯하다. '참외 1통 만원 수박은 덤'이라는 문구에 동공이 커졌다. 이 문구가 거느린 참외와 수박 군단의 모양이 특이하다, 어린 아이가 머리핀을 꽂은 것처럼 참외 하나를 붙이고 앉은 수박들이 질서 정연하다. 과일가게 주인의 착상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터무니없는 가격임에도 수박이라는 덤은 기꺼이 참외를 사고 싶게 만든다.
덤은 확실히 기운을 북돋운다. 시장에서 채소를 사더라도 나풀나풀 몇 잎의 덤은 에누리를 한 것처럼 고맙다. 물건을 살 때도 같은 값이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도 '증정품'이라고 덤이 붙은 것에 손이 더 간다. 덤은 공짜라는 생각에 무조건 반가운가 보다. 작은 것이라도 그저 얻게 되면 왜 기분이 좋을까. 진짜 참외 하나가 만원이라면 살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참외가 저보다 비싼 수박을 덤으로 품고 있으니 바로 사고 싶다.
가격표를 앞에 놓고 참외를 이고 앉은 수박, 둥글둥글 풋풋하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데도 마음이 간다. 참외보다 당당히 빛을 발하는 덤의 매력에 저절로 웃음이 난다. 똑같은 만원을 준다고 하면 그냥 수박보다 참외가 덤으로 안고 있는 수박이 더 맛있을 것 같다. 참외 값이 터무니없어도 큰 수박을 꽁짜로 얻게 되니 결코 비싸게 느껴지지 않는다. 참외를 꽂고 앉은 수박을 보고 있자니 하루가 행복해진다.
덤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달뜨게 한다. 몸이 늘 고달픈 내게도 달뜨는 시간이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니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과 덤으로 하는 일이 적지 않다. 일주일에 절반은 아침 7시에 출근해 저녁 9시에 퇴근하는 장애인 활동보조를 한다. 나머지 절반은 보상을 바라지 않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붓는 일이다. 실버들의 건강과 치매예방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강사 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봉사,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덤이지만 횡재한 기분을 선사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자의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인데 하다보면 자신이 얻는 기쁨과 보람이 더 크다. 음치, 박치, 몸치인 내가 어르신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장단 맞춰 몸을 움직인다. 어르신들은 이런 나를 당신들보다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긴다. 노래를 잘 못해도, 박자가 조금 틀리고 몸 놀림이 어색해도 환하게 웃으며 즐겁게 따라하신다.
덤이란 확실히 중독성이 있다. 바람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과 보람에 차츰 맛들이게 된다. 그것이 삶의 활력이 되어서 안 하고는 못 배기게까지 된다. 봉사를 하면서 사실과 상관없이 예쁘다, 잘한다, 고맙다는 말을 수없이 듣는다. 더듬어 보면 이전에 눈이 점점 나빠지고 아픈 것도 참아내며 했던 봉사가 실은 덤을 기대했던 마음이었음에 씁쓸했다. 그래서 어르신들 만나러 가는 날은 가슴이 더 뛴다.
이 세상에 진짜 공짜는 어머니 젖밖에 없다고 했다. 나란 사람도 결국 부모님의 사랑에 딸린 덤인 셈이다. 참외가 안고 앉은 수박처럼 언제나 나를 세상의 중심에 둔 까닭에 내 삶의 근원을 잊고 살 때가 많다. 드물게 마트에서 덤으로 주는 증정품에 눈이 어두워 계획에도 없는 물건을 살 때가 있다. 덤으로 인해 더 비쌀 수도 있다는 것을 순간 망각하는 것이다. 내가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부모님께 너무 무심했다.
누런 박스 종이에 쓴 '참외 1통 만원 수박은 덤'이라는 문구가 웃음을 머금고 있다. 박카스를 마신 기분이다. 근처에 있는 과일 단골가게에 가서 보여주면 어떨까. 그래서 비싼 참외 하나를 사서 친정엄마에게 가져가고 싶다. "엄마, 이 참외 한 개 만원이야." 하면 엄마는 뭐라고 할까? "수박은 덤이야." 하면 눈을 흘기며 웃으시겠지. 벌써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참외와 수박을 먹는 듯 마음에 수박 향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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