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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오리 날다 / 배단영

오리 날다 / 배단영  

 

 

 

호수는 은빛 윤슬을 만든다. 우거진 녹음 사이로 바람이 분다. 멀리 떠가는 오리 배, 수면 아스라이 앉은 오리와 뭇 새들이 풍경을 이룬다. 자 모양의 오리가 수면을 치며 날아오를 때, 순간 담담하던 풍경이 소스라치듯 놀란다. 푸드덕하며 날아오르는 날갯짓은 새들의 자유다.

군무가 떠오른다. 가창오리의 일몰 직후 날아오르던 그 비상과 선회는 시선을 압도했다. 숨이 막힐 만큼 기억에 오래 남을 광경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단지 생존을 위한 다급하고 힘겨운 몸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한 마리 한 마리가 어울려 펼쳐 놓은 거대한 그림은 한 폭의 점묘 화였다. 추위와 굶주림은 내 몸도 안다. 그래서 펼치는 두 날개라면 더욱 아름답지 않은가. 하늘을 거침없이 날아 자신을 드러내는 구도자 같았다.

아버지는 오리를 키웠다. 낯선 일이었다. 친정집 뒤 담장 너머엔 제법 큰 도랑이 있었다. 오리를 키우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아버지에게 오리는 제2의 인생을 열어가는 의욕의 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징용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내, 아버지는 그 긴 시간을 뒤로한 채 늘그막에 오리를 살뜰히 키웠다. 그 무렵 우리 집 앞에는 늘 솟대가 서 있었다. 솟대의 새가 오리라는 것을 예닐곱 나이에도 나는 알았다.

아버지의 오리들은 흰 깃털이 때가 묻어 늘 거무죽죽했다. 수탉처럼 홰를 치며 담장 위를 오르지 않았고, 닭들이 날지 않듯 오리도 날지 않았다. 그 오리들 사이에 몇 마리 전혀 다른 오리가 있어 늘 내 눈길을 끌었다. 목에는 흰색의 얇은 띠가 있고 가슴은 갈색이었다. 날개와 옆구리는 회색이었고 위 꼬리 깃털이 둥글게 말려 올라가 있던, 그건 청둥오리였다. 아버지는 어디선가 청둥오리 알을 가져와 서너 개를 부화 시켰다고 했다. 흰 오리 사이에서 자라는 청둥오리는 커갈수록 외모부터 달랐고 수컷의 부리는 노란색이고 머리는 광택이 있는 청록색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청둥오리들과 놀았다. 나의 청둥오리들은 물속의 물고기를 잡아먹고 물풀을 먹으며 헤엄치고 놀다 통에 담긴 사료를 먹었고 어두워지면 초막으로 다시 돌아왔다. 어느 날, 약으로 쓴다며 청둥오리를 사러온 사람에게 아버지는 두 날개를 하나로 모아 끈으로 묶어 청둥오리를 넘겼다. 내 눈처럼 오리는 젖은 눈으로 퍼덕였다.

언제 읽은 이야기였을까. 한 선비가 청둥오리를 잡아 가두고 먹이를 주며 기르려 했다. 하지만 오리가 끝내 먹이를 먹지 않자 선비는 그 오리를 풀어주며 말했다. '내가 주는 먹이를 먹었다면 너는 영원한 집오리가 되고 말았을 거야.' 야생의 오리를 집오리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이야기다. 청둥오리들은 가끔씩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야생으로 영 날아가 버릴 생각은 애초에 없는 것 같았다. 가끔 비탈진 언덕을 올라갔다 뒤뚱대며 내려올 뿐이었다. 이미 퇴화된 날개는 어깨의 일부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겨드랑이와 어깨쯤에 있는 날개는 사용하지 않고 잊어버렸기에 날개는 이미 날개가 아니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높은 장대를 설치해서 그물을 치기 시작했다. 날개에 힘이 오른 청둥오리들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을까. 하지만 그 여름 태풍이 한번 휘몰아치자 냇가에 세워둔 아버지의 그물막도 여지없이 장대가 넘어지면서 한쪽 귀퉁이가 무너져 내렸다. 그물막을 수리하는 동안 초막에 갇혀 지내던 오리들이 다시 냇가로 나왔다. 지저분한 날개를 씻어 깨끗해졌을 때, 아버지와 나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 아주 짧은 순간, 내 기억은 눈부신 빛 속으로 흩어졌다. 청둥오리 한 마리가 날개를 펼치며 몸을 위로 띄웠다. 그리고는 머리와 몸체가 평형이 되게 하고는 날개를 쭉 펼치자 앞으로 날아올랐다. 그때였다. 신호를 서로 보내고 있었을까. 한 무리의 오리들이 하늘에 낫 모양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청둥오리는 솟대를 지나 그 무리를 향해 더 높이 날았다. 지상에 있던 흰 오리들이 꿱꿱하며 날개를 퍼덕였다. 청둥오리는 날아오르다 잠시 공중에 멈춰 인사라도 하듯 고개를 젖혔으나 위로만 날아올라 무리들에 섞여버렸다.

낮잠은 달았고 오리들은 자맥질 중이었다. 꿈속에서 날아가는 청둥오리를 향해 나는 손을 흔들었던 것도 같다. 아버지 스스로 집오리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느끼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청둥오리를 키우면서 안주하지 못하는 본성에 위로를 얻은 것은 아니었을까. 두 날개를 펼쳐 하늘을 종횡무진 날아다니는 자유로움을 아버지는 상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 또한 아버지의 청둥오리들이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올라 자유롭기를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출근과 퇴근, 오랫동안을 나는 그렇게 생활했다. 나 자신의 꿈은 내려놓은 채 아이를 키우고 가정에 모든 것을 붓는다고 자위했다. 피곤에 젖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더러 나의 꿈을 돌이켜 본다. 한 때 영화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먼 외국으로 나가서 유학하고 영화감독이 되어 돌아오는 나를 그려보기도 했었다. 밥벌이가 중요했다고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나는 꿈을 접어 넣는 습관에 익숙해졌다. 그러면서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이러다 늙어죽는 것은 아닐까. 의문기호가 많아질 때 나는 집에서 키웠던 청둥오리를 떠올린다. 그 많던 오리 중에 유일하게 울타리를 박차고 창공으로 날아오르던, 무리와 하나가 되어 훨훨 날아가던 오리.

호수에 바람이 불자 물결은 찰랑거리며 춤춘다. 언제 보아도 물 위의 오리는 수면 아래 물갈퀴 발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오리 배는 여전히 묶여 있고, 에메랄드빛 하늘 한쪽에 새들은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