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 / 이영숙
내 이름은 세 개다.
할머니와 동네 어른들은 갑필이라 불렀고, 학교에서는 영숙이라 불렀다. 엄마와 두 언니는 갑필이도 아닌 맨재기로고 했다. 셋 중 어느 것 하나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싫다는 생각도 없어 부르면 곧잘 대답을 했다.
갑필이는 할머니가 손자를 바라면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할머니 회갑년에 태어난 손녀에게 이제 딸을 그만 낳으라는 의미로 지어 주었는데, 할머니 바람이 통했는지 이름 효험 탓인지 남동생이 네 명이나 태어났다. 터를 잘 팔아 줄줄이 남동생을 보았다고 할머니는 예뻐했다.
맨재기는 경상도 사투리로 시키는 일은 잘하고 고분고분하나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할머니에게는 여섯째 손녀이고 부모님에게는 셋째 딸이다. 말썽 없이 지내는 것이 사랑받는다는 걸 어릴 적부터 알았는지 아님 성격이 유순해서인지 우는 소리가 별로 없었단다. 조용하고 무엇이나 시키는 일만 잘 하다 보니 그렇게 불렀던 모양이다. 지금도 큰언니는 맨재기라고 놀리기도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한 동안은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지 못했다. 더구나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아버지 친구여서 “갑필이 왜 대답없노?” 하는 소리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동무들이 울보라고 놀릴 만큼 그 이름에 빨리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영숙이는 정이 좀 덜 간다.
우리 자매들 이름은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지은 느낌이 든다. 명숙, 점숙, 해숙, 영숙, 남숙, 용숙, 분숙, 아홉 여 종반 중 제일 위의 언니 둘만 빼고 모두 숙이다. 참으로 촌스럽고 멋이 없는 이름이다. 예쁘고 부르기 좋은 이름들이 많을 텐데도 적당히 부리기 쉬운 말로 지어준 것 같다. 남자 동생들은 돈을 주고 항렬에 따라 지은 이름이라 했는데.
영숙, 꽃부리영英, 맑을숙淑, 꽃봉오리처럼 맑은 사람이 되라는 뜻인지 맑은 물속에 핀 꽃처럼 아름다운 삶이 되라고 붙여준 의미인지 알 수는 없다. 자랄 때는 알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야 조금 궁금해진다.
이름과 달리 내 어린 시절은 그리 맑고 밝지도 않았고, 고운 꽃봉오리가 된 적이 없는 것 같다. 딸 막내이다 보니 언니들이 입던 옷을 물려받았고, 중학교에 입학하여서도 언니들이 입던 교복을 입었다. 어른들의 사랑도 남동생들 몫이었고, 내가 우선순위에 놓인 적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이름을 사전에서 찾으면 ‘사람의 성 아래 붙여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며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담아 두는 그릇이 우리 몸이라고 한다면 이름은 그 그릇을 꾸며주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 그림을 내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그려주셨다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
개교한 지 100년이 되는 학교에 근무할 때 졸업생 명부를 전산화하면서 이름의 흐름을 본 적이 있다. 여자 이름으로 간난이도 있었고, 우분이, 늠이, 심지어 꼭지 있었다. 우리 할머니는 송전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났다고 정송전이다. 이런 이름이 아닌 것만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40~60년대 가장 많은 이름이 영자, 정숙, 영숙, 미경이란다. 그래도 난 선택된 이름인 듯 하여 위안이 되지만 이직도 영숙이는 그리 달갑지 않다. 셋 중에 고르라면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갑필이가 더 좋다.
사람이 어떤 이름으로 불린들 마음과 행동이 달라지랴. 삐뚤어지고 보잘 것 없는 토분에도 백합이 피어나고, 멋진 도자기에 심은 꽃도 보살피지 않으면 볼품이 없듯 이름이 갑필이면 어떻고 영숙이면 어떠랴. 또한 맨재기라 불린들 내 그릇은 변함이 없다.
이름이 의미보다 내 그릇 속에 따뜻한 정과 참다운 마음을 담으려 노력하면 그때 내 이름은 빛이 나겠지. 맑은 물속에 피어나는 한 송이 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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