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이구 / 임지영
많은 일이 있었던 조금 전 상황들이, 택시 창밖풍경과 함께 스쳐 지나간다. 뒤 좌석에 나란히 앉아 집으로 가는 길, 그는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한다. 아무 말 없이 한동안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시선이 그의 발에 멈춘다. 어두웠지만 분명 슬리퍼를 신은 맨발이었다. 양말과 운동화를 신을 여유도 없이 한달음에 달려올 만큼 다급했던 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놀라지 말고 내 말 잘 들으라며 전화를 하였지만 그는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방금 전 아찔한 상황들이 그려져 나도 모르게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좀 전에 난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었다. 카드로 계산을 하고, 물건들을 봉지에 넣었다. 서둘러 봉지를 팔에 걸치고 지갑에 카드를 넣으며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계산대 앞에 무엇이 놓여 있었는지는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 무릎만치 높은 묵직한 물체에 걸려 순식간에 내 몸이 엎어졌다. ‘딱’ 소리가 난다. 다른 신체 부위로 방어할 여력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가방은 일 미터 밖으로 멀리 밀려갔고, 손에 들린 봉지도 튕겨져 나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앉은 채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팠다. 따뜻한 액체가 내 손에 묻어나왔다. 피를 보자 손이 부르르 떨린다. 계산대 직원이 담당자를 급히 부르는 소리가 난다. 누군가 내게 둘둘 말은 휴지를 건넨다. 고개를 끄떡 하며 급한 데로 입을 가렸다.
서서히 일어났다. 다행이 두 다리는 멀쩡해 보였다. 가방까지 걸어가 누군가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그 순간 생각나는 사람이 한사람 밖에 없었다. 집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그, 나를 보더니 “뭐하세요? 빨리 구급차부터 부르세요”한다. 담당자와 이야기 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통이 왜 계산대, 그것도 출입문 입구에 나란히 놓여 있는 겁니까?”
담당자의 말로는 누가 계산대 앞에 가져다 달라며 부탁을 했다고 하는데 그 손님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라며 덧붙여 말했다. 담당자의 말을 듣고 난 그의 팔을 잡았다. “흥분하지마, 침착해”하였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나를 보고는 ‘으이구’ 하며 말하던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곧이어 구급차가 도착했다. “보호자도 타실 겁니까?”하는 구급대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차에 먼저 올라탄다.
그런 그의 모습이 난 잠시 낯설었다. 항상 회사일과 회사동료가 먼저였고, 아이들과 난, 가족이란 이름으로 가끔씩 함께하는 그의 들러리쯤으로 느껴졌었다. 퇴근 후에 운동과 술자리를 하며 집에는 전화 한 통 하지 않은 그를 난 그만 기다리겠노라 수많은 밤 다짐을 했었다.
가끔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도 크게 웃는 그, 정작 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서 서운함이 들었다. 세월이 가면 그렇게 점차 서로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는구나 싶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사는구나 하며 모두들 별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었네 하며 한편으로는 그런 사실들이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었다. 하지만 내가 오늘 본 그의 모습은 달랐다.
응급실에 도착했다. 접수를 하는 동안에도 입은 다물고 있는데 자꾸만 피가 묻어 나왔다. 아랫입술 밑면이 뚫린 것 같았다. 혀로 잇몸을 훑었더니 앞니 두 개가 4~5mm정도 쑥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의사가 내 이름을 부른다. 사진을 찍은 후 잠시 뒤 의사가 말하길 “사진으로 봤을 때, 이에 금이 간 것 같습니다. 정확한 건 이 주 후에 다시 사진을 찍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하였다. “그럼 오늘 처치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다 해 주십시오”하는 그의 말에 의사는 나를 수술대에 눕혔다. 마취주사를 여러 번 나눠서 주입하는지 입 주변이 따끔거리더니 점점 무감각 해졌다. 초록색 면으로 내 얼굴을 덮었다. 부산하게 움직이던 의사의 두툼한 손이 멈췄다. 기다림 끝에 마지막 매듭을 짓는 느낌이 났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시 윗입술과 잇몸에 마취를 하더니 아래로 뻗어있던 이를 힘주어 위로 제쳤다. ‘딱’소리가 나자 의사는 같은 부위에 한 번 더 힘을 주었다.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혹시라도 반대로 힘을 주어 한순간에 부러지는 것은 아닌지 무서웠다. “아프시죠? 다 됐습니다. 거울 한번 보세요”하는 의사의 음성이 들렸다. 조금 전 아래로 뻗어있던 이가 원래 내 이처럼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의사는 원래 이가 가지런했는지 한 번 더 묻더니 다시 힘을 주어 이를 맞춰 주었다. 온 몸에 힘이 풀리면서 큰 숨이 쉬어졌다. 조금 전 마음과는 달리 정말 다 나은 기분이었다.
그는 여전히 내 가방을 허리춤에 끼고 의사에게 이것저것 물어 본다. 급하게 나오느라 아무것도 없이 나온 그가, 내 가방을 자연스럽게 열어 병원비도 계산하고 나를 대신해 약도 받아온다. 그리고는 집에 가자며 내게 손을 내민다. 나를 보더니 다시 “으이구~”라고 말하는 그를 보며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가고 잔잔한 물결만이 내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 하듯이 기분 좋은 일에 함께 할 친구나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어렵고 힘든 일을 함께할 사람은 별로 없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다고 믿으며 내 모든 걸 쏟아 부었던 사람들도 한순간에 등을 돌려 버리면 그만이었다. 결국엔 허무함만 남아 그 자리에 다른 누군가를 들이는 일이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부부의 관계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음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난 그 급박한 상황에서 생각나는 단 한사람이 남편이었듯이, 그에게도 나란 존재는 모든 걸 내던져 버리고 달려올 만큼 소중한 사람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힘들 때 함께 할 수 있어야 그것이 진짜 관계다.
택시 안에서 살포시 잠든 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겹쳐 놓았다.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토닥토닥 두드렸다.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나 괜찮다고’ 손으로 말했다. 택시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를 흔들어 깨웠다. “집 앞이야, 이제 다 왔어” 두 손 마주 잡고 그와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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