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개님 / 이용옥
윗집에서 또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참 드물게 고상한 취미를 가진 녀석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녀석은 이제 더 이상 그 취미생활을 하지 못할 테니까. 그깟 개소리쯤이야 얼마든지 수용할 의사가 있다. 나도 그 정도 포용력은 있는 사람이다.
그동안 나는 노이로제에 결렸었다. 집 안에만 있으며 예민해지고 신경질이 났다.
‘딱, (잠시 침묵)또르르르르… 딱, (또 침묵)또르르르르…’
딱! 하는 소리가 나면 반사적으로 온몸의 핏대가 속고 나도 모르게 저속한 언어들을 쏟아냈다. 한 번은 물 컵을 집어던져 유리조각을 치우느라 X고생을 한 적도 있다. 그래봤자 나만 손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시달리다 보면 누구나 그렇게 될 거다.
윗집으로 이사 온 사람은 좀 셌다. 밤늦게까지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셌고, 기르는 애완견의 짖는 소리도 셌다. 그리고 무엇보다 반년 이상이나 우릴 괴롭혀온 정체모를 그 소리의 여파가 셌다. 단단한 원형의 물체가 땅에 떨어져 구르는 듯 한 소리-. 처음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점점 세게,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거다.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인사라도 나누며 좀 조심해 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그러나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다. 개 짖는 소리마저도 그날은 들리지 않았다.
소리는 점점 대범해졌다. 집에만 오면 들어야 하는 ‘딱 또르르’는 정말 날 미치게 했다. 그 매너 없는 소리의 원인이 뭘까 고심 하다가 내린 결론은 골프였다. 채에 맞은 공이 ‘딱’소리를 낸 뒤 퍼팅매트 위를 지나 마루 위를 구르며 내는 소리 ‘또르르’, 아무리 골프에 문외한이기로서 두 달이 지난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아채다니, 아둔해도 너무 아둔했다. 그동안 윗집 골퍼는 무지한 아래층 인간을 개의치 않고 마음 놓고 채를 휘둘러 왔던 것이다.
이런 추론은 의혹 속에서 헤매던 때와는 다른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소음도 소음이지만, 조롱당한 것 같아 더 화가 났다. 즉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당신이 뭔 짓을 하는지 다 안다, 그 짓거리 당장 때려치우지 않으면 가만히 안 있겠다’고 단단히 으름장을 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층계의 반도 올라가기 전에 그놈의 개가 짖었다. 다소 의기소침해졌지만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기척이 없다. 다시 딩동! 그래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딩동딩동딩동! 화풀이라도 하듯 연달아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박차고 나올 태세로 개만 악악거릴 뿐, 끝내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도 두어 번 더 찾아갔지만 역시 허탕이었다. 머리 위에선 분명 공치는 소리가 나는데 찾아가면 개 짖는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윗집엔 환갑은 넘은 것 같은 남자가 혼자 살고 있다고 한다.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는 바깥출입을 할 때면 험상궂은 개를 대동한다고도 했다. 한 번은 건장한 남자 둘이 시커먼 차를 타고 와 뭔가를 들이밀고 갔는데 평범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내 상상력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그렇다면 위층엔 주먹계의 큰형님이 살고 있다는 말인가. 골프공이나 두드리며 한가로이 노후를 보내는 왕년의 형님을 알현하기 위해 그 추종자들이 때 없이 드나든다는 얘긴가. 아니면 말 못할 사건에 연루되어 바깥활동이 자유롭지 않은 초로의 신사가 밤낮없이 공놀이로 세월을 낚고 있다는 것인가. 좀 심한 비약이었지만 아파트에서 제 맘대로 골프를 치고, 아무 때나 발소리를 쿵쿵거리며, 성대수술도 하지 않은 개를 실내에서 키우는 무법자임을 감안하면 지나치다고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를 대면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댕댕거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을지 누가 알 일이람. 그날 이후 그 쪽을 향해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전의를 상실했다고 불만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위층의 또르르는 여전했고 내 스트레스 지수는 높아만 갔다. 원망도 항의도 할 수 없는 막강한 파워 앞에서 모든 불만은 내 스스로 삭여내야만 했다. 텔레비전 볼륨을 공 구르는 소리보다 크게 하고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며 전원생활을 상상해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퇴근 후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피신을 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부당한 힘에 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감은 스스로에 대한 존재감까지 한없이 추락시켰다. 비례해서 내 언어와 행동도 거칠어져만 갔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난 후의 퇴근길에 계단에서 맞닥뜨린 남자, 60이 되었을까. 그의 손엔 쓰레기 봉지가 들려 있었다.
“처음 뵙는데, 이 라인에 사세요?”
남자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크지 않은 키에 평범한 얼굴이다.
“그럼 혹시…. 406호에 사시나요?”
역시 고개만 까딱. 눈길을 피하는 남자, 과격해 보이진 않는다. 적이 마음이 놓인 난 단도직입적으로 캐물었다.
“저는 306호예요. 골프 치세요?”
“네? 아…, 네에.”
남자는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벼르던 말을 있는 대로 쏟아냈다. 이래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이미 터진 봇물이다. 그런데 더듬거리며 내놓는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개, 개가 골프공을 가지고 노, 놀았나 봅니다.”
허얼! 평생 골프공 한 번 만져보지 못한 나는 그야말로 개가 치는 공에 제대로 뒷골을 가격당한 기분이었다. 어이없는 변명에 쌍심지를 돋우며 목소리를 높이려다 하마터면 코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저 사람이 그 마피아계의 큰형님이었던가. 터질 듯 물러 담은 쓰레기봉지를 들고 고개도 못 든 채 엉거주춤 서 있는 개님의 풍모라니….
“개한테 골프공을 쥐어주시면 어떡합니까아. 아래층도 생각을 해주셔야지요!”
나는 타이르듯 점잖게 말했다. 제 잘못을 끌어안고 기꺼이 개가 되어버린 험악하지도 무섭지도 않은 내 이웃. 고마운 건지, 허탈한 건지, 미안한 건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그 순간 나는 그를 흔쾌히 용서하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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