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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영혼 없는 말 / 박동조

영혼 없는 말 / 박동조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말이 사회 곳곳에서 넘치던 때가 있었다. 빨래를 하다가 전화벨이 울려 비누 묻은 손을 닦는 둥 마는 둥 하고 달려가 수화기를 들었을 때, 기계음에서 울리는 이 소리가 들리면 뒷소리는 듣지도 않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사랑이란 단어가 그때처럼 공허하게 들린 때가 없었다. 진심이라고는 먼지만큼도 느낄 수 없었던 녹음된 말이 사람의 기분을 잡쳐놓았다. 몇 년 뒤 이 말은 감동하는 고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주변에서 슬며시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나도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 살아온 모양이다. 어느 날, 동아리 후배가 충고를 했다. 왜 언니는 모임에 나온 회원들을 보고 번번이 '고맙다'는 말을 하느냐고 했다. 마치 녹음기 소리처럼 들린다는 것이었다. 모임의 주인이 언니인 것 같은 느낌이라고도 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하는 말을 내 뜻과는 다르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며칠 동안 웃음가마리가 된 기분에 사로잡혀 멍하게 지내다 처지를 바꿔 곰곰 생각해보니 그렇게도 느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말을 할 때만 내 것일 뿐, 입 밖으로 나가면 듣는 사람 몫이라고 글에서도 썼던 내가 그 사실을 잊고 속을 끓였다. 나는 당연하게 쓴 말이 후배에게는 영혼 없는 말로 들린 것이다.

우리가 듣는 기계음 중에 의도 없이 만들어진 소리는 없다. 이익을 추구하든, 질서를 일깨우든, 정보를 전하든 목적을 두고 만든다. 모임을 내 것으로 생각해 본 기억이 없는데 후배가 그리 느꼈다면 말을 내보낸 나의 입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 뒤부터 주의 깊게 나를 관찰했다. 고맙다, 예쁘다, 혹은 미안하다 등의 말을 습관으로 사용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잦은 감사 표시나 칭찬은 '사랑합니다, 고객님'처럼 진심 없는 소리로 들릴 여지가 있었다.

객지에 있는 아들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고맙다고 한다거나, 남편이 밥을 맛있게 먹었을 때 고맙다고 하는 경우는 서로에게 익숙한 가족끼리니 상대편을 어리둥절하게 하지는 않았을 터다. 자주 쓰는 말이어도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는 걸 가족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말이었다.

그동안 나는 약속한 시각에 정확히 도착하고도, 상대방이 나보다 먼저 와 기다리는 것이 미안하다고 했다. 상대편이 약속 시각보다 먼저 온 것에 내가 왜 미안하다고 했는지에 생각이 미쳤다. "일찍 왔네, 오래 기다렸어?"하면 되는 것을 굳이 사과하는 말을 했었다.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내 쪽에서 되레 "고맙습니다."라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물건을 사고 값을 치르면서도 고맙다고 했다. 아마도 계산하는 직원은 그 말이 접수가 안 되었을 것이다.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예사로 봐 넘겼던 반응이 자신을 객관의 눈으로 바라보고부터 새롭게 보였다. 고맙다는 말 대신 "많이 파세요." 했더라면 가게 주인은 쌀 한 톨만큼의 진심이라도 느꼈을 게 아닌가.

불시에 벨을 눌러 자신이 섬기는 신을 믿으라는 군소리로 짜증이 나게 한 종교인에게도 '시간이 없어 들어 줄 수 없어 미안해요' 했더라면 꾸역꾸역 듣기 싫은 소리 듣느라 고역을 치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관문을 나가는 그에게 고맙다고 한 것이 두고두고 거슬렸다. 입과 마음이 따로 노는 내가 위선자로 느껴졌다.

말은 마음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마음을 담아내는 그릇이 부실하거나 말을 배치하는 기술이 부족하면 오해받기에 십상이다. 듣기 좋은 말도 제대로 써야 빛이 난다. 습관으로 말하는 인사말보다 은근한 미소가 사람의 마음을 더 움직인다는 걸 스스로의 언행을 관찰하면서 터득했다. 진즉 사실을 깨달았더라면 후배로부터 쓴 소리는 듣지 아니했을 것이다.

말은 산 짐승과 같아서 의지라는 힘을 가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와 듣는 이의 마음을 해작질하기 일쑤다. 사람의 입으로 하는 말, 달리는 말처럼 길을 들여야 한다. 잘 길들인 말이 준마이듯,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말을 가려 쓰는 사람은 품격 있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요즘 말을 길들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