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추억 / 정의채
뒤뜰로 난 창호지 문을 열고 툇마루에 나서서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뒤뜰을 무성하게 뒤덮은 딸기 잎들에 더하고 덜할 것도 없이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잎들이 빗방울을 맞을 때마다 간지러운 듯 살짝살짝 흔들렸다. 눈을 돌려 장독대를 보니 장독들 위에 빗줄기가 부딪쳐 다시 뛰어오를 뿐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사흘째 이어져 내리는 장대비.
소년은 방으로 들어와 손잡이에 묶인 끈을 세게 당겨 창호지문을 닫고서는 다시 마루로 나가서 밖을 내다본다. 아무리 궁리해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체념한 듯 마루 끝에 걸터앉아 발을 내려뜨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높은 하늘에는 빗줄기가 끝없이 이어져 내리고 있었다.
헛간에 빈 지게가 홀로 며칠째 서 있고, 삼태기, 멍석, 낫이며 농기구도 심심한 듯 보였다. 처마 끝에서 낙숫물이 떨어져 흙이 패인 곳에 고인 물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투명한 물방울이 생기고 그중 몇은 잠시 터지지 않고서 흘러가기도 했다. 아무 색깔도 없는 물방울이 그리 예쁠 수가 없었다. 물이 흘러넘치는 세숫대야에는 큰 물방울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소년이 숫돌과 세숫대야 사이에 있던 개구리 한 마리를 발견하였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꿈쩍도 안하고 배고픈 듯 가끔 입만 벌리고 있었다. 다른 날 같으면 벌써 쫓아가 잡으려 했을 터인데 오늘은 행여 조금이라도 놀랄까봐 소년도 개구리처럼 꼼짝 않고 턱을 괴고 앉아 살펴보고 있었다. 어찌해서 안마당까지 들어왔는지 궁금했다.
온 식구들과 모여 점심 식사를 하는데 소년이 먼저 일어나 급히 개구리를 찾아보았다. 개구리를 찾아 안마당 곳곳을 둘러보는데 빗줄기가 가늘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하늘도 조금씩 환해지는 걸보니 비가 그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등 뒤에서 어른들 대화 소리가 들렸다. 논에 나가보아야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비가 거의 그치자 가운데 삼촌이 헛간에 가서 삽을 하나 집더니 대문 옆에 세워두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떡 할 때 쓰던 채를 두 개 들고 오는 것이 아닌가. 소년은 급히 할머니께 “저 삼촌 따라 가도 돼요?”라고 여쭈었다. 어른들이 서로 눈길을 교환하더니 이내 아무도 말이 없었다. 늘 어른들은 일을 나가고 소년 혼자 집에 남게 되니, 항상 남겨진 말은 “어디 가면 안 된다.”였는데 오늘은 삼촌을 따라 나가니 안 될 이유가 없었다. 처음 벌어진 상황이 모두에게 새 세계를 여는 이상한 느낌이 스쳤다.
빗물이 쓸고 간 바깥마당은 비질했을 때보다 더 깨끗하고 곱게 보였다. 우물 아래 있는 미나리 밭을 지나면서부터 소년은 자신이 살던 세상 밖을 처음 가보게 되었다. 서쪽 바다로 향한 널따란 소달구지길이 곧게 나 있고, 오른편 논에서 왼편 논 길 위로 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두 삼촌은 가끔 뒤를 돌아보며 소년을 확인하고는 앞서 가고, 소년의 고무신 안으로 물이 흘러들어 발가락 사이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소년은 가끔 고무신을 물속에서 발가락에 걸어 끌 듯 걷다가 삼촌들이 멀리 떨어지면 종종걸음으로 쫓아가곤 했다. 발에 부딪는 물살의 감촉이 신선했다.
삼촌이 논두렁으로 접어들었다. 논물 냄새와 풀 냄새가 싱그러웠다. 한껏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도 비가 쏟아졌는데 말랑말랑한 흙으로 만든 논둑이 터지지 않다니. 논마다 아래 논으로 흐르는 자그마한 폭포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소리는 마치 생명체를 키워내듯 생동감이 있었다.
가운데 삼촌은 논두렁 터진 곳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작은 폭포에 체를 거꾸로 내리 누르며 붙잡고 있으라고 하고 한 마디 다짐 시킨다. “체 들지 마라.” 소년은 고길 잡으려는 걸 짐작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체 입구를 물이 흘러 나가는 아래 논으로 향하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소년은 쪼그리고 앉아 한 손으로 체를 늘러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떨어지는 물에 손을 넣어 보곤 했다.
잠시 후 삼촌이 돌아와서 체를 꺼냈을 때 소년은 눈앞의 광경에 놀랐다. 소년의 손바닥만 한 붕어 한 마리와 대여섯 마리의 달치(송사리)가 물 빠진 체 안에서 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년은 아래 논에서 물고기가 폭포를 거슬러 올랐다는 걸 믿기가 어려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체 안에 있는 물고기가 튀는 걸 보며 소년의 가슴도 놀라움으로 두근거리며 벅차올라 물어볼 마음을 잠시 접기로 했다. 집에 가져가면 할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실까? 마치 식구를 위해 사냥에 성공한 가장의 마음처럼 소년에게 사내의 본성이라도 용솟음친 것 같았다.
얼마 뒤 양동이에 제법 물고기가 찼다. 하늘은 언제라도 다시 비를 내릴 듯 흐려있어 금세 어둑해졌다. 소년은 집이 있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처음이었다. 자기가 사는 마을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가끔 발길을 확인할 뿐 눈은 마을을 주시하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작은 산 아래 언덕에 열 집 남짓의 초가집들이 있고 그 앞으로 바람에 푸른 파도가 이는 들이 펼쳐 있었다. 저만치 초록 들 위에 눈부시게 흰 두루미가 선을 그으며 내려앉았다. 초가지붕 뒤에서 흰 연기가 솟아오르더니 이내 낮게 깔리고 돌담을 은은히 감싸며 사라졌다. 집에서 맡던 연기 내음에 이끌리듯 삼촌 뒤를 바짝 쫓아 발걸음을 옮겼다. 뿌듯함으로 가득한 마음에 손에 든 양동이가 가벼웠다.
올 여름은 비가 유달리 자주 내렸다. 지금도 비가 내리다가 하늘이 훤해지면서 날이 개기 시작하고 바람이 불어 이마를 시원스레 스치면, 마음은 어김없이 고향 뜰을 거닐고 있다. 그 어떤 보석보다 소중하게 간직해온 어린 시절의 추억에 내가 그만 갇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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