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부자 / 김미정
나이 한 살씩 더 먹을수록 형제 많은 것이 다행이다 싶다. 게다가 언니가 여럿인 것이 더욱 고맙기만 하다. 나는 1남 6녀 중 다섯째다. 언니가 넷이고 오빠와 동생이 한명씩이다. 당연히 동네에서 딸부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가정환경 조사서를 작성할 때 가족 수를 적는 란이 있었다. 내심 부끄러웠다. 형제 수를 이야기하면 되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아니쿠, 딸부자네.”였다. 어린 나이에도 그 어투가 부러워하는 기색이 아니라 참 안됐구나 하는 느낌을 고스란히 전해 받았다. 그러다 보니 딸이 많고 식구 아홉이라는 것이 민망스럽기만 하였다.
언니들은 집안의 일꾼이었다. 일을 하러 나가는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을 보살피고 식사며 빨래며 청소 일을 했다. 그 중에서 집안일을 도맡은 큰언니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큰언니가 중학교에 가면 동생들은 초등학교에도 못갈 형편이었다.
아버지는 자식 교육에 의지가 없었다. 반면에 어머니는 어떻게 하든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딸을 학교에 보내는 임무는 어머니가 맡았고 갖가지 일을 감당해야 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헛고생 한다며 타박을 했다. 돈 없으면 학교에 안보내면 그만이라 했다. 운동화 대신 고무신을 신으면 되고 밥 대신 국수를 먹으면 된다고 했다. 아버지 따라 밭일이나 도우라며 목청을 높였다.
어머니가 밤늦게 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더욱 극성을 떨었다. 모두 우리 때문이라며 자식을 원망하고 어머니를 찾아오라며 집밖으로 쫓아 보내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더 힘이 들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어디 있을까 싶지만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지극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아버지에게는 어머니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음은 틀림없다. 그 깊은 정을 철없는 자식들은 당연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언니들에 비해 모든 것이 나은 편이었다. 그래도 불만은 있었다. 매번 물려 입은 교복은 어디가 크거나 작거나 했다. 책가방은 고리가 없거나 끈이 부실하거나 모퉁이가 헤져 있었다. 언제 새것 한 번 입고 가져 보나 했지만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늘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것을 사용했다. 새 물건이 부러웠지만 한 번도 드러내 놓고 투정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언니들이 그렇게 다니고 싶어도 포기해야 했던 학교 때문이었다. 언니들이 마음속으로 속상했을 정도를 알지 못했지만 철없는 마음에도 더 바라면 안 된다는 생각은 조금 갖고 있었나 보다. 아무튼 형제자매들은 별 탈 없이 잘 살았다. 언니들 네 명이 마침내 모두 결혼을 했다. 결혼 후라고 하여서 자식을 돌보는 일이 그치는 것이 아니다. 딸이 시집가면 어머니에게는 AS를 해야 할 일이 더욱 많아진다. 사돈댁에 사건이 생기면 문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큰언니의 시아버님이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언니가 어른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한숨을 매번 내쉬었다. 둘째 형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어머니의 신음은 깊어졌다. 가까이 살던 셋째 언니의 시어른도 쓰러져 딸의 힘든 수발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주름살은 깊고 늘어만 갔다. 나무가 크면 가지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한다. 딸 다섯 집안일이 오죽할까. 어머니의 근심은 굴비 두릅처럼 꿰어져 줄어들 줄을 몰랐다.
나는 독신을 선언했다.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결혼 후의 갖가지 집안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결혼 안 한 딸이 집안의 가장 큰 우환이고 어머니의 큰 걱정거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쨌든 결혼을 했다. 언니들과 다르게 잘 살리라 다짐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느닷없이 남편이 사표를 내고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2년이 지나면서 막막한 상황이 되었다.
학교를 제대로 다닌 나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언니의 눈치를 보았다. 한번은 친정에서 형제계를 만들어 돈을 조금씩 모아 가족여행을 따나자는 의견이 나왔다. 내 형편을 생각한 언니들은 나중에 한꺼번에 내라고 했다. 그 말에 발끈해 이제 가족도 아니라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조금이라도 섭섭한 말을 들으면 내가 못살아 그런다고 자격지심에 빠진 것이다. 그런 나를 언니들은 구박하지 않고 더욱 조심스럽게 내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지기만 한다.
한때 언니들이 사는 모습이 한심하다고 여긴 적이 있다. 옷을 제철에 사 입지 않고 머리 손질도 언제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신발도 늘 그 신발인 것 같아 왜 저렇게 사느냐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언니가 종종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나를 집으로 오라하여 맛있는 밥상을 차려 주었다.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조카 생각이 났다며 아이 옷이나 장난감과 반찬이며 필수품을 챙겨 주었다. 자기 치장은 안하고 살림이 어려운 동생을 위한 배려였다.
언젠가 언니 집에 갔을 때다. 맛있게 차려진 밥을 먹고 아이를 등에 업고 일어섰을 때다. 언니는 아껴 모은 돈 5만 원을 꼬깃꼬깃 접어 기저귀 가방에 넣어 주었다. 집에 도착하자 무사히 도착했는지 안부 전화를 하면서 가방을 살펴보라고 했다. 오히려 많이 넣지 못하여 미안하다고 했다. 모두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더 힘든 사람들도 많다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그날 한동안 울먹였고 아기 기저귀로 눈물을 닦았다. 그런 언니들의 자매애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처럼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언니들이 벌써 50을 넘겼다. 항상 나를 존중해 주고 용기를 주었던 언니들이다. 앞으로 내가 받은 사랑을 얼마나 돌려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받기만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럽게 내겐 막내 여동생이 하나 있다. 언니들이 그랬듯이 막내 동생에게 아낌없이 주는 언니가 되고 싶다. 딸부자이지만 내게 여동생이 하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고 고맙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물론 언니들만큼 할 수 없지만 자상한 끝 언니는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아이구 딸부자네.”
이 말이 그렇게 넉넉하고 듣기 좋은 말일 줄은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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