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미니멀리스트 그 사람 / 박헬레나

미니멀리스트 그 사람 / 박헬레나

 

 

 

내 카톡방에 낯선 사람이 들어와 앉아 있다. 그가 노크를 한 적도, 내가 문을 열러준 적도 없는데 월담을 한 것 같다. 그냥 두고 지나쳐 보던 어느 날 갑자기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주인 허락도 없이 남의 거처에 침입한 무뢰한이 누구일까? 월담하도록 간절함이 있었다면 무엇일까. 평범한 이름 김OO이다.

인터넷 검색어에 이름을 쳤더니 여럿의 김OO이 떴다. 동명의 이인들이 가진 직업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풍기며 다가온다. 변호사, 아나운서, 회계사, 사십대의 시의원, 코미디언, 한의학박사, 철학교수 등등.

코미디언은 물론이려니와 새파랗게 젊은 정치인이 내방을 기웃거릴 이유는 없을 것이고 생명을 다루는 의사 역시 나와는 무관해 보인다. 철학교수를 찍어보다가 최소주의문법(glossary)이란 책을 쓴 동명의 인물에 눈길이 머문다. 글을 쓰는 나와는 다소 연관이 있으려나 싶었으나 그의 이력을 보니 문단 말미의 이름 없는 서생을 넘석거릴 분은 아닌 성싶다. 국내 굴지의 대학 강단을 섭렵하며 35년을 교단에서 강의를 했다는 그분은 chomsky를 연구한 영문학자다.

나는 김OO이라는 사람보다는 최소주의(minimalism)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처음 접하는 용어다. 미니멀리즘은 최소한의 요소들만을 사용하여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는 예술 및 문화 사조를 말한다. 단순하고 가벼운 것을 지향하는 나의 작은 가슴에 붙여줄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미니멀아트는 태초에는 시각예술과 음악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나 차츰 연극, 영화, 디자인,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었다.

문학에서의 최소중의는 불필요한 언어를 최대한 제외시켜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만큼 간결한 언어에 접근해 간 글쓰기를 이름이다. 모든 기교를 지양하고 극도로 단순한 표현과 객관적인 접근을 한 글, 글쓰기에도 다이어트가 요구된다는 이야기다. 내가 늘 추구하고 있으나 도달하지 못한 경지다.

나는 요즘 문학이나 예술이 아닌 삶의 최소주의에 빠져 있다. 오랜 대가족 생활에 대한 반작용인지 알 수 없으나 최소한의 소유로 최대한 가볍게 살고 싶은 욕구가 세찬 바람이 되어 등을 떠민다. 이미 한참 밀려왔다. 대가족이 살던 큰 집을 처분하고 작은 거처 하나 마련하여 최소한의 도구만 가지고 옮겨 앉았다. 홀가분하다. 참으로 희한한 것은 놓아버린 것에 대한 미련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이다.

어느 잡지에 그들은 무거워서 어떻게 사는가란 글을 실은 적이 있다. 종종 그런 요지의 글을 쓴다. 용어는 알지 못할 때였으나 최소주의를 함의한 글이었다. OO 씨도 그 글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던가, 읽고 글쓴이가 궁금했던가. 생각이 통하는 사람, 나는 거기까지 비약했다. 어느새 한 사람에게 점을 찍고 있었다.

최소주의는 나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한 몸으로 자랐는지도 모른다. 어제 오늘 스쳐간 생각이 아니니 말이다.

욕심 없는 사람은 쓸모도 없다.”

자랄 적 할머니에게서 자주 듣던 지청구다.

모름지기 한 집의 맏며느리는 음흉하도록 속 깊은 우물이어야 하거늘. 너는 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보자기 하나도 못 지닐 위인이다.”

시어머니께서 실속 차릴 줄 모르는 며느리를 향하여 풀어놓으시던 걱정이다. 얕은 접시물이 되어 속내를 드러내는 며느리가 몹시 못마땅했을 것이다. 깊은 우물도, 두둑한 창고도 못되는 작은 가슴은 어쩌면 태생적인 것이 아닐는지. 내 그릇에 넘치는 것은 버겁다. 버거우면 짐이다. 삶의 최소주의는 무소유가 아닌 꼭 필요한 만큼 소유하고 단순하게 살자는 논리다. 결국 그 밑바닥에 꿈틀거리는 본질은 어떤 서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은 자유를 향한 갈망이다.

작은 집이 살갑다. 내 품에 든다. 여태껏 온전한 내 집에 살아본 기억이 없다. 결혼 전까지는 부모의 집에 살았다. 우리 집이었다. 결혼을 하고도 새댁에 들어갔으니 역시 우리 집이었다. 시어른과 아이들, 수시로 드나드는 객식구 사이에 낀 내 자리는 운신할 폭이 좁았다. 삶의 공간에 본인의 의사를 반영할 여지는 없었다. 우리한 단어가 붙으면 그것은 공동의 운명을 지닌다. 공동의 소유는 공생의 장소다.

식구가 줄어 생전 처음 내 방이 하나 생겼다. 만년에 가져본 나만의 성역, 한쪽 벽면에 책꽂이를 짜 넣고 컴퓨터가 놓이고, 꽃무늬 상보를 덮은 앉은뱅이책상도 하나 놓았다. 소박한 방이다. 내 꿈이 영그는 방, 나는 이 작은 것에 깊은 애정을 느낀다.

의조하지 않았는데 내 방이 또 하나 생겼다. 달팽이집처럼 한 몸이 된 스마트폰, 그 안의 카톡방이다. 그곳에 온갖 지인들이 드나들며 수다를 떨고 정보도 주고받는다. 무단 침입자가 버젓이 들어와 앉았던 바로 그 방이다. 쓰던 전화기를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면서 사건이 벌어졌다.

카톡방도 새 전화기에 옮겨주세요.”

기어이 무식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것은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이라 한다. 결과 무단침입자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방에서 사라져 버렸다. 조금 아쉽다.

사라진 미니멀리스트, 그는 상당한 학식과 지성을 갖춘 멋쟁이인 성싶다. 언제쯤 알은체 해볼까. 어떻게 접근할까 탐색 중이었는데. 내 생애에 집에 찾아든 사람 내쳐보기는 처음이다. 당신 누구냐고 진즉 물어보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스럽다. 담 밖을 서성거리다 뒤돌아서는 연인의 등을 바라보는 심정이 이럴까. 늦은 후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