숟가락 이야기 / 남영숙
흠칫 놀랐다. 아침의 서늘한 기운 때문이다. 얼마 전만 해도 그 바늘 끝처럼 따갑던 햇살이 이토록 유순해지다니. 영영 올 것 같지 않던 가을이 온 것이다.
화장실에 귀뚜라미 한 마리가 들어와 바닥을 기어 다닌다. 녀석은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니란 걸 모르는 걸까. 별 고민이 없어 보인다. 정원에 놓아주려고 돌아다니는 놈을 생포하려니 좀체 붙잡히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쪽의 선의를 모르는 것이다. 포기하고 말지만 신경은 온통 녀석에게 가있다. 이튿날 은신처에서 나온 모양인지 내 눈에 또 띄었으나 이번 포획도 실패했다. 먹이를 찾지 못할 이 공간에서 저러다가는 죽고 말 터인데.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녀석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 이삼 일이 지나는 동안 녀석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둑신한 저녁임에도 갈색의 윤이 나는 몸피가 바퀴벌레임이 틀림없다. 탁 내리치려는 순간, 손이 반사적으로 올라왔다. 애꿎은 목숨이 죽을 뻔하였다. 귀뚜라미였다. 며칠을 굶었으니 이번에는 어떻게든 ‘체포’해서 제가 살아갈 곳으로 옮겨 줄 것이다.
풀밭에 부려진 녀석은 제 세상을 만난 듯하다. 한 생명을 구해준 뿌듯함이 발끝으로부터 차오르는 순간, 맨손으로라도 죽여 버릴 대상이었던 바퀴벌레가 떠올랐다. 귀뚜라미가 죽으면 애꿎은 목숨이고, 그 미물이 죽으면 잘 죽은 것이라는 자신의 인식에 대해 잠시 생각한다. 왜 그것은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눈에 띄는 족족 없애 버려야 하는지를.
생각의 관성이다. 그렇게 인색해 왔으니 지금도 그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고 보면 생물의 생태적 특성은 천형이다. 아름다운 소리로 울며 가을을 알리는 귀뚜라미를 인간은 좋아한다. 녀석은 제가 가을을 알리는지, 제 소리가 아름다운지를 모른다. 그저 유전자의 설계대로 살고 있을 뿐. 같은 맥락에서 바퀴벌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신의 ‘천출’을 눈치 채지 못하고 신의 의도대로 그저 무구하게 살아가는 생물일 뿐. 바퀴벌레의 입장에선 무척 얼울할 것이다.
그것들의 태생적 한계는 요즘 화자 되는 인간세상의 금수저, 흙수저의 개념으로 옮겨진다. 차이가 있긴 하겠으나 어쩌지 못하는 굴레라는 점에서는 같은 맥락으로 봐도 좋을 듯하다. 그것은 이 땅에서 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십여 년 전, 이집트에서 출간된 소설 ‘아쿠비안 빌딩’에서 주인공 타하는 수재로 성적이 우수하다. 경찰대에 지원한 그는 여러 관문을 쉽게 통과하며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으나 마지막에 쓰디쓴 좌절을 맛본다. 아버지다 ‘바웹’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가구 주택의 계단을 청소하고 가구주의 잔심부름을 하면서 건물 입구 한 귀퉁이에 거처를 얻어 살아가는 직업이다. 천출의 타하는 바웹의 아들이 어떻게 ‘감히’ 경찰대에 지원했는가 하는 비아냥 섞인 수군거림을 들으며 좌절한다. 몇 해 후 그는 극단주의 무장단체에 가입하여 반정부 활동에 앞장선다. 우리나라보다 더 경직된 사회, 이집트의 소설 속 이야기지만 세상의 여느 나라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물림을 끊는다는 것은 고착화된 계층 간 차이를 없앤다는 것일진대 결코 쉽지가 않다. 세월이 흐를수록 철옹성으로 견고해져 신분상승의 사닥다리는 없어져 간다. 청춘들은 암호를 모르는 채 문을 열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린 형국이다. 생경한 이정표 앞에 내던져진 느낌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고 재미없지 않은가.
세상은 그렇기만 할까. 반전의 여지는 없는 걸까. 대저, 금수저도 본시는 흙수저였다는 사실이 누비옷처럼 따뜻하게 우리를 위무한다. 오래전, 부의 종마가 되고자 노력했던 선대의 덕택으로 금수저의 계보가 창출된 것이다. 부의 종마는 부를 낳고 또 낳는다. 그런 세상임에도 상속된 부나 명예가 없으면 당대에 이루면 될 일이다. 쉬운 일이 아님을 누가 모르랴.
골프 여제(女帝)가 되어버린 박인비 선수를 생각하면 흐뭇해진다. ‘된’이 아니라 ‘되어버린’을 쓴 소이는 그의 성정을 칭찬하기 위함이다.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은 했지만 마음은 늘 비워두고 ‘대박’이라는 신기루에 앙앙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스포츠 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다 가지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선수로서의 성공보다 그의 말솜씨와 품성을 더 칭찬한다. 넉넉하지 못했던 환경에서 자랐다는 그가 어떻게 스물여덟의 어린 나이에 그런 의연함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상금으로 많은 재물을 모으고 어려운 이를 위해 거금을 쾌척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온 온기를 반사할 줄 아는 그는 입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금수저가 된 것이다. 뚝심으로 성공을 이룬 섬 소년이었던 최경주 골프선수도 흙수저의 귀감이 되지 않겠는가.
앞선 나의 모든 진술의 토대 위에서 나는 소망한다. 흙수저들이 신분상승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평화스럽고 행복한 세상, 그런 세상이 오는 것이 용이할 것인가. 흙수저가 급수저가 되는 것이 더 빠를 것인가. 어느 쪽의 가능성이 클 것인지.
귀뚜라미와 바퀴벌레를 보면서 잠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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