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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첫사랑을 생각하다 / 이상은

첫사랑을 생각하다 / 이상은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어요.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내 나이보다 제 아들 녀석 나이가 훨씬 더 많았으니까요. 행여나, 어쩌다 만나면 "오랜만이다" 해야 할까요. 아니면 "오랜만입니다." 해야 할까요. 막상 만나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웃고만 서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첫사랑 이야기를 꺼내면 짧은 영화 한 편쯤은 될 줄 알았는데 기억을 정리해 보니 몇 장면뿐이네요. 신문 시사만화만치만 남았어요. 살면서 조금씩 잃어버린 탓이겠지요.

 

장면1

길을 따라 벚꽃이 피었어요. 여학생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봐요. 저만치 떨어진 곳에 남학생이 서 있어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네요. 부끄러워 여학생의 눈길을 피하고 있나 봐요. 교복을 입었어요. 중학생들입니다. 동갑내기고요. 열다섯 살입니다. 여학생은 살포시 웃고 남학생은 얼굴이 빨개요. 이 장면에는 대사가 없습니다. 남학생이 준비한 대사는 많은데 한마디도 못해요. 대사를 다 까먹었어요. 여학생이 웃는 순간 며칠을 준비한 대사는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그 자리에 여학생의 웃는 얼굴이 그려졌어요. 엽서 그림 같은 이 장면을 이토록 오래도록 기억할 줄은 소년은 몰랐겠지요. 내 삶의 지금 이 순간이 먼 훗날 어떤 그림으로 그려질지는 누구도 모르지요. 삶이 끝나는 순간에나 알까요. 신은 가끔 인간이 그린 그림에 장난을 치기도 하지요. 신이 이 장면에 제목을 붙인다면 '첫 만남'이겠지요. 저는 '선물'이라고 할 겁니다. 괜찮은 제목이지요?

 

장면2

커피숍이네요. 두 사람 앞에 커피가 한 잔씩 놓여 있고요.

"나 졸업하고 군대 간다. 시집갈 데 없으면 나한테 와라." 대사가 좀 이상하네요. 이런 청혼을 누가 받아들이겠어요.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웃네요. 농담한 줄 아나 봐요. 남자는 뜬금없이 프로야구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여자는 커피를 마시고요. 남자는 즉흥 대사를 오랫동안 이어갑니다. 이 장면은 여기가 끝입니다. 제가 이 장면에 제목을 붙인다면 '바보'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어 청혼도 저렇게 바보 같이 하네요. 돌아보니 살면서 바보라는 제목을 붙여야 할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저 나이 때, 미래 걱정을 많이 했어요.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도 없는데 말이에요. 어리석지요. 언젠가부터 앞날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냥 기다립니다. 때가 되면 결과는 알게 되고 어차피 받아들여야 하지요. 미리 가슴을 졸이며 살 필요는 없지요. 미래를 걱정하는 후배들을 만나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지금 시작해라. 사랑이든 일이든. 미래와 결과는 신에게 맡겨라. 너의 일로 신을 바쁘게 해라. 저는 못했지만 제 아들이며 딸들은 꼭 그리하며 살면 좋겠어요.

 

장면3

남자가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짧습니다. 전역한지 얼마 되지 않았나 봅니다. 맞은편에 여자가 걸어옵니다.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부릅니다. "윤숙아" 여자는 모르는 사람처럼 남학생 앞을 지나갑니다. 온 세상이 멈추었습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여자만 움직입니다. 여자는 갓난아이를 업고 있어요. 시어머니인 듯 보이는 할머니가 아이를 보고 웃습니다. 출산 때문인지 여자는 곱던 얼굴이 초췌합니다.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남자는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습니다.

신이 이 장면에 붙인 제목은 '너 그럴 줄 알았다.' 아닐까요. 신이 남자를 조롱해도 원망할 수도 없을 거예요. 제 부족한 걸 누굴 탓하겠어요. 남자는 여자가 지나간 길을 바라보며 건강한 얼굴을 빨리 되찾기를 바랐대요. 내가 저 여자를 정말 많이 사랑했구나 생각했대요.

저는 이 장면의 제목을 '무제'라고 붙이겠어요. 운명을 완성해야 할 신이야 지금 일어나는 일은 과거에 행한 너의 그 일 때문이라고 말하겠지만 인간인 저는 그러고 싶지 않네요. 봄꽃이 피면 혹독한 겨울을 이기고 피었네 하지 말고 그 꽃은 분홍이구나 하고 내일이면 시들겠구나 하지 말고 해를 받아 눈이 부시구나라고 칭찬하고 싶네요. 과거도 미래도 생각 말고 지금만 생각하며 살고 싶네요. 과거와 미래는 신의 일이고 현재는 인간의 일이지요.

 

장면4

이 장면은 미래에 일어났으면 하는 일입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벚꽃 길을 나란히 걸어갑니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웃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쪽도 무탈하시지요."

두 노인이 천천히 걸어서 멀어지네요. 이 장면 속에 언젠가 제가 출연할 수 있을까요? 신에게 이 장면의 제목을 물으면 침묵하겠지요. 신은 결코 인간에게 미래를 미리 알려주는 법이 없으니까요. 신이 숨기는 미래를 인간은 상상하고 바라는 미래를 희망이라고 부르지요.

만약 저 장면에 제가 출연하면 "나 너 좋아했다." 이 대사를 꼭 할 겁니다. 이 장면 제목을 '축복'이라고 붙이고 싶네요. 인생에 이런 장면 한 장쯤 끼어 있으면 축복 받은 인생이겠지요.

글을 마무리해야겠어요. 사랑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뒤죽박죽이 됐네요. 어디 사랑 이야기만 이러겠어요. 사는 일이 다 그렇지요. 인생의 완성은 신의 몫이라 해 두기로 해요. 과거에 매달리지도 말고 미래도 걱정 말아요. 우리 오늘을 사랑하기로 해요. 살다 보면 선물도, 축복도 받겠지요. 마지막으로 첫사랑에게 이 말은 남기고 싶네요. "친구여, 사는 날까지 별 탈 없이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