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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제단을 짓다 / 박금아

제단을 짓다 / 박금아  

 

 

 

송구영신 미사를 드리고 오는 길이었다. 아파트 현관의 시계는 새벽 한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승강기를 기다리는데 분리 수거물 창고 밑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 재활용 쓰레기를 내놓고 불을 켜둔 채로 간 모양이었다. 을씨년스런 내부가 연상되면서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자꾸만 눈길이 갔다. 용기를 내어 문을 당겨보고는 깜짝 놀랐다. 너저분하던 창고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새 주인이신가. 문 입구 벽에서 하회탈 할아버지가 환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콧수염 아래로 허허! 너털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어서 들어오라고 하는 것 같아 안으로 들어섰다. 곁에는 하회탈 할머니가 연지곤지를 찍고서 하얀 레이스 너울을 쓰고 있었다. 산호색 귀걸이를 달고 가슴에는 빨간 조화 장미 한 송이를 꽂았다. 금혼식이라도 치르는 중인가? 영문도 모른 채 나는 하객이 되어 들어섰다.

화조화(花鳥畵) 병풍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신랑신부에게 부귀영화를 빌어줌인가. 붉은 모란 세 송이가 벙글고 있었다. 은은한 향기가 불러들였음이다. 새 두 마리가 날아들고, 엉뚱하게도 바닷게 두 마리도 집게 발가락을 뻗어 꽃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노랑나비 한 마리도 날개를 팔랑이며 날았다. 먼 바닷길을 건너온 것일까. 몇 번 파도에 내려앉았던 듯 날개에는 푸른 물이 배었다. 모두 재활용 쓰레기를 이용하여 벽을 꾸며 놓은 것들이었다.

창고 가운데에 큰 작업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스티로폼 상자 몇 개를 포개어 양쪽으로 쌓고, 그 위에 널따란 나무판을 올렸다. 작업대 위 왼쪽에는 해체된 종이상자들이 네모 반듯반듯하게 개켜져 있었다. 푸새하여 다듬이질을 마친 제관의 제의 같다고나 할까. 오른쪽에는 작업에 필요한 문구용 칼과 가위, 노끈, 목장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엉뚱하게도 나는 제대 위의 제구(祭具)들을 떠올렸다.

재활용 쓰레기들을 분리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승강기를 타느라 지나다 보면 경비원 아저씨가 창고에서 작업하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내가 쓰레기를 부릴 때 하는 흥뚱항뚱한 몸짓과는 다른, 고요하고 정갈한 손길이 연상되는 소리였다. 호기심에 들여다보면 빈 종이 상자와 신문지, 광고지, 우유 팩 등을 해체하여 끈으로 묶는 모습이 사뭇 진지했다. 다 쓴 볼펜 심, 새로 산 와이셔츠 깃에 꽂힌 침, 빵 봉지를 묶은 철사 끈 하나도 이삭 줍듯 했다. 따로 그릇으로 담아 선반에 올려 두는 손길이 성스러울 정도였다. 성체를 분배한 후에 성합(聖盒)에 남은 부스러기조차 포도주로 헹구어 몸에 모시는 사제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전율이 일었다. 거룩한 제단이라고 할까.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지고 머리가 조아려졌다. 아저씨의 작업대는 버려진 것들에게 새 생명을 입히는 장소 같았다. 해체 작업을 거친 하나하나는 뼈가 되어 살을 입고 생명체로 다시 태어날 것이었다. 한낱 밀가루 과자가 미사라는 의식을 통하여 제단 위에서 성체(聖體)로 변화하듯이 말이다.

창고 한쪽 구석에 각 세대에서 내놓은 버림치들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도 아저씨의 손을 거치면 소용 있는 것으로 변화될 것이었다. 한낮에도 문을 열기조차 꺼려지던 공간을 환하게 바꾸어 놓았으니 목장갑을 낀 아저씨의 손에서 생명 탄생의 울음을 들었다면 과장일까. 웅크리고 구겨진 것들에게 숨을 불어넣는 기적의 손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겠다. 물건뿐 아니다. 그 물건을 다루었던 사람들에게 멈춘 시간을,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려내는 손이다.

며칠 전이었다. 재활용 창고에서 만난 이웃 아주머니는 무척 상기된 낯빛이었다. 실수로 버린 것을 찾았다며, 호랑이 머리가 그려진 낡은 갈색 스마트폰 케이스를 들고서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었다. 다 낡은 물건인데 눈물까지 흘리다니 뜨악하다 싶었는데 아들이 사 준 것이라며 말끝을 흐리는 게 아닌가. 순간 아차, 싶었다. 오래도록 가까이 지내면서도 아들에 대해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에 그녀에게도 양달에 꺼내놓지 못할 사연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면서 마음자리가 만져졌다.

소용없어져 한두 번쯤 바닥으로 던져졌던 기억 없는 사람 있을까. 구석진 자리를 지켜야 했던 응달의 기억 같은 거 말이다. 그가 그늘진 자리에 눈길을 주기 시작한 것은 명퇴를 당하고부터였다고 했다. 오랜 세월을 중견기업에서 임원으로 지냈던 터라 눈 돌려본 적 없던 자리였다. 몇몇 일자리를 거쳐 경비원이 되고부터는 밑바닥에 던져진 것들에 연민을 갖게 되었다. 그것들이 내는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도 했다.

경비원의 숫자를 줄이는 일에 동의한 일이 떠올랐다. 다수 의견을 좇아 편한 선택을 하고 만 일이 부끄러웠다. 그래도 그에게서 서운한 기색이라고는 읽을 수 없었다. 전과 다름없이 밝은 표정으로 혼자서 아파트 세 개 동을 열심히 가꾸었다. 그 뿐 아니다. 집에서 찾다가 없는 급한 생활용품도 그곳에 가면 구할 수 있을 정도다.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재활용 창고 앞을 지날 때마다 들러서는 또 무슨 살림살이가 늘었나, 살펴보게 된다.

오늘은 벽에 낯선 글귀 하나가 나붙었다. 경비원 아저씨가 보내는 새해 인사였다.

주민 여러분, 새해에는 돈도 많이 세시고, 별도 많이 세시기를 빕니다.’

가슴이 뛰었다. 승강기를 타려다 말고 아파트 마당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별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하나, , . 그 별들 아래로 손을 밀어 넣으면 따끈한 아랫목이 만져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