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지문 / 김희자
연분홍 꽃은 지고 없다. 연이틀 비가 내리더니 꽃 치마 휘날리던 나무가 또 다른 옷을 갈아입는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 꽃 진 자리에 멍하니 서서 반곡지의 풍경 속으로 빠져든다. 꽃을 버린 가지가 연초록 이파리를 하나둘 낳았다. 여린 잎들이 바람의 숨결을 품으며 몸을 키운다. 길어 난 가지에 하늘하늘……. 꽃 대신 잎이다. 바람 불고 키 작은 풀들이 파르르 떤다. 바람 좋은 날에는 가늘게 부는 바람결에도 나의 몸은 전율한다.
들판에서 만난 바람이 힘을 모아 몰려온다. 바람이 몰려오자 물속 풍경이 사라진다. 물이 바람의 길을 알고 몸을 연다. 세상을 밟고 건너온 바람이 만나 못 위에서 하나가 된다. 손에 손을 잡고 몸을 비비며 물 위에 눕는다. 연못은 허공에다 몸을 내어주고 물은 바람을 위해 끝없이 자신을 낮춘다. 침묵하는 연못의 적막을 툭툭 치며 바람이 지나가자 물결이 일며 반영이 지워진다. 물속 풍경을 지우며 지문이 생긴다. 적멸의 여백을 흔드는 바람의 길이다. 꽃 진 후 반곡지를 찾은 이유는 순전히 연록의 반영을 보기 위함이다. 하나 나는 봄 언덕에 서서 생각지도 못한 풍경 하나와 우연히 만난다. 바람이 만드는 지문이다.
봄빛에 물든 나무의 그림자가 수면에 어린다. 물 위에 발끝을 세운 바람은 연못가에 선 나무속까지 낱낱이 훑는다. 아리아리한 연록들의 흔들림이 비친 연못은 곧 우주의 세계다.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풍경이 눈부시다. 물의 촉수들이 일제히 수런거리기 시작하다, 바람이 재빠르게 물속을 빠져나간다. 눈부신 날개를 펼쳐 물 위로 날아오른다. 물을 흔들던 바람이 허공으로 사라진다. 바람의 길을 따라 물에 새겨진 지문이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해마다 이맘때면 연중행사처럼 불쑥 이곳을 찾는다. 풍경이 그려지는 반곡지로 달려와 연애를 하다가 돌아가곤 한다. 복사꽃등이 이울고 나면 반곡지의 풍경이 절색이다. 못가 나무들이 낳은 풍경을 보면 우주는 그 자체가 살아있는 장엄한 빛깔이다. 일렁이는 어린 나뭇잎들의 비명을 듣노라면 바람의 흔적이 느껴진다. 바람의 오밀조밀한 지문을 넋 놓고 바라보며 서서 생각에 잠긴다. 사람의 마음도 바람에 일렁이며 저처럼 소쇄해질 수 있다면 어떤 환경을 준다고 해도 두려울 게 없을 터인데…….
풍경이 보이는 언덕에 서서 나는 바람의 길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눈으로 보면 보이는 것만 보인다. 가슴으로 보면 보이는 것 너머 세상도 들어온다. 오랫동안 나는 보이는 것만 사랑하며 살았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사랑할 수 있었으면. 보이지 않는 바람도 빛깔이 있다. 투명하지만 색유리처럼 맑고 선한 빛깔이다. 복사꽃 흐드러진 언덕을 지나온 바람은 연분홍빛, 쪽빛 바다를 밟고 온 바람은 남빛일 것이다.
세상에 바람 아닌 것이 있으랴. 스쳐 간 인연 또한 모두 바람이었다. 내 생에도 틈틈이 크고 작은 바람이 불어왔고, 꽃이 피고 질 때마다 수많은 바람이 다녀갔다. 매일 다녀가는 바람은 똑같은 바람이 아니었다. 어제와 오늘 부는 바람은 분명 달랐다. 설익은 나를 흔드는 바람에 버티고 서서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으면 저 연못처럼 삶의 지문도 하나씩 사라졌다.
삶의 지문들이 어찌 고운 무늬로만 남았을까. 젊음과 사랑, 아름다움도 다 시간의 산물이다. 눈물로 살아낸 시간이 얼룩져 남은 지문도 있었고, 환희로 들끓다 수놓아진 지문 또한 남겨졌다. 이루지 못할 꿈을 꾸던 소녀시대로부터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이길 갈구하는 중년에 이르기까지 지문은 겹치고 어긋나면서 소멸하고 탄생했다.
내 등 뒤로 사라진 어제도 바람이 남긴 지문이다. 남겨진 지문들을 가만히 만져보노라면 내 생이 아려온다. 삶의 마디마디에 남겨진 아픔의 흔적들……. 혼자 사는 헛헛함이 짠하게 지문 하나를 찍는다. 어떠한 바람에도 가슴 다치지 않는 나비처럼 세상을 건너야 하건만 나는 늘 세파에 가슴을 베이고 베였다. 바람은 침묵하며 부는데 나는 나뭇가지 하나의 흔들림에도 소리를 냈다.
얼마나 더 떠밀려가야 생의 상처가 치유되고 아픈 지문이 사라질까. 이제는 정말 가난으로 생긴 지문은 지우고 싶다.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바람의 풍경 앞에서 내 삶의 지문을 일으키는 바람을 달랜다. 괴로움에 짐짓 웃을 양이면 슬픔도 고운 이야기로 승화될 수 있음을 스치듯 지나간 바람이 이렇게 많은 생각을 남기고 갈 줄이야.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에 다시금 새 바람이 불어오듯 내게도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바람이 스칠 터이다. 그리하여 생이 깎여 다듬어지고 혹은 새로운 모양이 생겨날 것이다. 살다보니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은 바람이 남긴 지문이었다.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은 나 지신의 반영이며 내 삶의 지문이었다. 그래서 바람 속을 홀로 걷는 법도 터득하지 않았는가. 한 걸음을 걸어도 나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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