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 김해자
귀에 익은 차 소리가 마당에서 멈췄다. 나는 튕기듯 몸을 일으켜 블라인드 비늘살 하나를 들어 올린다. 짐작대로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잔디 깎는 기계를 차에서 내리고 있다. 머릿속에서는 센서처럼 자동으로 숫자가 헤아려진다. ‘하나, 둘, 셋, 넷, 타르르르…….’ 기계가 요란한 소리를 내자 남자는 성큼 정원으로 올라선다.
나는 보름에 한 번 이 남자를 만난다. ‘만나다’의 단어 뜻이 ‘마주하여 본다’라는 사전적 의미로 따진다면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마주 대하여 본 적이 없다. 그는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수 있다. 왜냐면 그가 나타나면 나는 블라인드를 내려서 안을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나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조 모른다. 그가 낀 진한 선글라스와 집 안의 블라인드는 같은 도구일 수도 있다.
남자를 은밀하게 훔쳐보는 일에는 나름의 순서가 있다. 잔디를 깎는 소리는 마당 좌측에서 시작한다. 부엌에서 그를 확인한 나는 커피포트에 전원을 넣는다. 커피 향이 집안에 짙게 깔리면 욕실에 딸린 창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다. 그를 가까이에서 볼 기회다. 앞마당에 있는 잔디를 다 깎은 남자도 좌측 옆 마당으로 동선을 바꾸기 때문이다.
잔디는 집을 중심으로 앞, 옆, 뒤, 전체를 깎아야 한다. 그의 동선은 좌측에서 시작하여 우측으로 한 바퀴 돌고 난 뒤, 다시 둥근 칼날이 달린 기계를 들고 각을 세우기 위해 한 바퀴를 더 돈다. 그 다음 강한 바람을 빨아들이는 통을 들고 돌며 깎아 놓은 잔디를 치우는 것으로 일을 마친다. 일 년 동안 그의 동선을 지켜봤으니 이제는 눈을 감아도 남자가 어디쯤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서른 중반쯤 되었을까. 미국에서 나고 자랐을 남자의 육체는 눈이 부시다. 남부의 따가운 태양과 밀고 다니는 기계의 요란한 소리는 남자를 더 번들거리게 한다. 나는 모든 촉수를 동원해 그를 훔친다. 서서히 눈과 귀가 반응한다. 숨소리가 신경이 쓰일 때쯤, 욕실 창 블라인드 비늘살에서 손을 뗀다.
아직 커피잔은 따뜻하다. 뜨거운 태양이 데운 남자의 몸을 감싸듯 심장이 뻐근해 온다. 뒷마당은 거실이나 방, 어디에 있어도 내다볼 수 있다. 이 나라는 많은 시간을 뒷마당에서 보내기 때문에 집안에서도 쉽게 보이게 해 놓았다. 욕실에서 나와 방으로 간다. 내 몸이 더 자유로워진 상태로 그를 훔쳐보기 위해서다. 블라인드를 반쯤 열었다. 여전히 남자가 안을 볼 수 있는 확률은 높지 않다. 넓은 뒷마당에서 남자는 더 당당하다. 기계는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남자가 지나간 자리마다 잔디는 키를 맞춘다.
오후 두 시, 그늘 하나 없는 잔디 위에서 남자의 얼굴은 태양의 열기로 땀이 흥건하다. 창 하나가 남자를 마음껏 탐닉하게 해준다. 누릿한 털로 가득한 팔과 다리의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커피잔에 입술을 댄다. 커피는 목줄기를 타고 내 몸 깊숙한 곳에 닿는다. 창문 가까이 남자가 다가온다. 나도 모르게 숨소리를 죽인다. 땀 때문이지 남자의 선글라스가 코끝에 걸렸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눈동자가 순간 움직인 것 같다. 내 마음을 남자가 눈치를 챈 게 아닐까. 몸이 타버리는 줄도 모르고 불빛에 날아드는 불나비처럼 남자가 유리창을 깨고 대게로 달려드는 환상에 빠진다.
기계 소리가 멈췄다. 잔디에 각을 내기 위해 둥근 칼날로 바꾸기 위해서다. 조용한 적막이 신경을 한 곳으로 쏠리게 한다. 눈빛이 엉킨 그 순간, 남자와 나는 은밀한 그 무엇을 주고받았던 것 같다. 눈을 감았다. 같은 동선으로 움직일 거란 내 생각대로 더 예민해진 기계 소리가 앞마당에서 들린다. 이제 그를 보지 않고도 느껴진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침대에 몸을 완전히 눕혔다.
소리가 움직인다. 가까이 왔다가 멀어진다. 내 몸도 소리에 의해 경계를 허문다. 심장이 아득해진다. 아득함 속에서 몸이 떨린다. 깎인 것에 각을 내는 기계 소리는 날카롭다. 그 날카로운 소리가 내 몸을 낱낱이 훑고 지나가는 느낌에 소름이 돋는다. 소름을 참기 힘들어 눈을 떴다. 소리가 멈췄다.
상처를 받은 잔디는 깔끔하게 다듬어졌다. 남자는 바람을 만들어 모든 흔적을 없앤다. 식어버린 커피를 싱크대에 쏟아버리고 수돗물을 틀었다. 블라인드를 올리자 빛이 왈칵 쏟아져 들어온다. 멀쩡한 사람도 긴장하게 하는 따분한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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