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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땡볕 / 박정순

땡볕 / 박정순  

 

 

 

휴일 한나절 내내 집안 청소를 마친 뒤 어머니를 따라나선다.

함께 가서 일손 보태달라는 눈치 때문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지난봄부터 특별한 일 없으면 쉬는 날 오후 일정으로 잡히게 됐다.

목적지는 집 근처의 제법 너른 공터, 새로 조성된 주택단지 귀퉁이에 다음 단계 공사를 위해 남겨둔 자투리 부지이지, 아무나 사용하라고 버려진 게 아니라는 경작금지 안내판이 서 있음에도 극성스런 손길들이 밭두렁 나누어 부쳐놓은 작물이 자라고 있다.

가진 문서로 권리 주장할 수 없는 땅이니 먼저 씨앗 묻거나 모종 꽂아놓은 사람의 경작권을 인정해주는 게 이곳 나름의 관례인데 내놓고 밝히기 뭐하지만 그 쪼가리 밭 임자 중에 우리 시어머님도 들어 있는 것이다.

햇살 미지근해지는 이른 봄부터 시작해, 비늘구름 뒤에서 잠깐씩 숨 돌린 태양이 대지를 태워버릴 듯 땡볕을 쏟아 붓던 여름내 식구들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머닌 줄기차게 거기 나가 사셨다.

자식들, 곡식 키우는 것만은 자신 있고, 남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은 가지가지 곡식 이름 대기와, 어느 작물을 언제 심어 어느 때 거둬야 하는지와, 그리고 절반쯤은 흙으로 보이는 손으로, 생명 있는 씨앗들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해주려는 경작 본능이자, 아직 다 버리지 못한 토지 집착증에서일까.

한 뼘 땅이라도 놀리면 죄악이지! 뼈에 박힌 신앙인 듯, 내 손으로 길러먹는 것에만 익숙해서 농작물은 선뜻 돈 주고 사 먹질 못하는 성격 탓이기도 하다.

챙 넓은 모자와 수건으로 땡볕에 맞섰지만 군고구마처럼 까뭇하니 타버린 주름밭 얼굴이며, 오른쪽 무릎한테 사정해 놓으면 왼다리가 덩달아 들고 일어나는 관절통에 시달리면서도 악착같이 나왔을 밭 임자들이 여럿 보인다. 아무리 삶이 고되어도 밭에만 나오면 땅의 기운이 야윈 다리 힘줄을 타고 올라오는 듯이.

하지만 하늘이 떨구어 주기 전에는 물 한 방울 구경하기 어려운 도심 텃밭엔 솔개그늘 덕조차 쉽질 않아서 고추농사는 포기한 채, 크는 대로 솎아다 먹을 요량으로 씨앗 부쳐놓은 얼갈이배추가 구실 못 하고 외레 땅속으로 기어든다.

돌다리 끝에서 불꽃이 튈 가뭄에 시달린 끝에다 오갈병까지 들어서 농사 꼴 남이 알까 민망하고, 얼개미 쳇바닥처럼 벌레 구멍 숭숭한 이파리엔 선뜻 손길 가지 않는다.

밭둑에다 뽑아버린 쇠비름이 지독한 가뭄 속에서도 악착같이 고갤 치켜들고 일어선다. 저걸 봐도 한세상 살자고 생겨난 것들 중에 제 목숨을 스스로 저버리는 건 인간들밖에 없지 싶다.

그동안에 잡초란 이유로 뽑아버린 풀들이 얼마며 내 밭곡식들한테 해가 된대서 잡아 없앤 진딧물, 응애, 굼벵이온갖 버러지들은 얼마이려나. 그런 짓이 다 살면서 지은 인간의 죄라면 죄 아니랴.

울타리 삼아 박아놓은 말뚝과 줄을 움켜잡은 채 호박 줄기가 억척스레 기어오르고 있다. 꽃매자리 겨우 면한 애호박 윗마디마다 서너 개 암수 꽃이 따로 피었는데 꿀벌 한 마리가 들락거리다가 온 몸뚱어리에 노란 분칠을 한 채 꽃을 옮겨간다.

밭 가장자리 둘러 심은 옥수숫대가 제법 쪼가리 그늘이나마 드리운 채 개꼬리 치켜세우기 경쟁을 하고 있다. 옆의 것에 지기 싫어하는 건 저것들 판이나 사람 세상이나 마찬가지일 터. 겨우 남은 이 터전에서도 삶을 향한 경쟁은 치열하다.

막바지 땡볕을 견디지 못한 옥수수 잎들이 시름시름 늘어졌으니 통을 챙겨들고 꽤 먼 집까지 오가며 물을 길어다 준다. 야윈 대궁 위로 쭉 쭈욱- 물 빨아올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수염이 부석부석 말라가는 걸 보니 틀니 성치 않은 노인네들 뜯어 잡숫기 마침맞게 여물었으리.

조바심처럼 기다리던 수확의 계절, 어느덧 개미 땀 흘린 자국 정도의 소나기라도 부러웠던 가뭄 여름이 그렇게 지나가고 가을이 제대로 왔음을, 여름 끝에 자취 감춘 장수잠자리 대신 메밀잠자리들이 알려주었다.

말벗삼아 어머니를 따라가 보니 호박 하나가 곱게 늙어있다. 큼지막한 잎들 뒤에 숨어 있다가 늦게 발견된 행운과, 게을러서가 아니라 하루 볕이라도 더 쬐어 따 들일 생각으로 그냥 남겨둔 보람이 있었다.

밭고랑 파 엎을 때마다 뿌리 따라 올라오는 고구마 거두는 재미에 흐뭇하다. 가을밭에 나가는 게 없이 사는 딸네 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더니 그래서 예부터 어른들은 코훌쩍이 애들한테조차 가을이면 놀아도 들에 나가서 놀라고 내몰았을 것이다.

한쪽에 치워두었던 어머니 전용 캐리어에다 호박과 고구마부터 싣는다. 당신보다 더 늙어 꼬부라진 그림자 하나 데리고 다니기 벅찰 만큼 쇠잔한 어머니 대신 수레를 밀어 집을 향한다.

자식들은 흙 안 만지며 살게 하려고 당신이 호미 자루 더욱 움켜잡아온 고향살이 접은 뒤, 주인 모르는 밭에 눈치껏 짓는 올 농사를 팔순 시어머니와 오십 줄 며느리의 합심으로 마무리했다. 어머닌 이 작물들을 위안 삼아 한 해를 잘 사셨다.

일 년 소출을 셈해봐야 할미새가 씨앗 값 받으러 올 허튼 농사, 인근에 농산물 도매시장이 있어 좋은 곡식을 저렴한 가격에 골라먹을 수가 있고, 더 편하라고 채소행상 차량이 줄을 서다시피 드나드는 데야 이런 내막을 아는 이가 괜한 청승이라고 핀잔한들 대꾸할 말이 궁하긴 하다.

돌아보니 저만치 떨어진 철탑 위에서 저 밉상들 언제 흙손 털고 자리 뜨나, 끈기 있게 기다리던 텃새들이 우르르 빈 밭에 몰려와 앉는다.

가을걷이 서두르길 잘했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공터 경계로 높은 담이 쳐지고 거대한 중장비들이 땅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향수 공원'을 만든단다. 금싸라기에 비유되는 이곳 땅에다 웬 공원일까 했는데 고향 떠나 사는 시골내기 노인들이 여기다가 악착같이 농사짓는 걸 보고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한쪽에 초가집 지어 지붕에 박 덩굴 올리고, 텃밭 가에 원두막을 짓고, 그 앞에다가는 도랑 파고, 뒤켠에 물레방앗간을 세우고, 바로 옆이 보리밭 메밀밭 자리란다.

내남없이 사정 있어 도회지로 흘러왔을망정 다들 저 살던 델 그리워하기 마련이니 여기 와서 고향 보듯 하라는 배려일 터다.

공원이 다 되면 여기가 그 고향이거니 생각하고 자주 와야겠지만 어머니로선 가재 등딱지 땅조차 없어졌으니 배추꽁지 농사마저 올해로 끝인 셈이다.

버스 몇 정류장 가면 주말농장이 있다니 거길 알아볼 순 있겠으나 문명에 대한 어지럼증에 다리 힘 부치는 어머니한테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또 겨울이 끝나면 서랍장 속의 씨앗들이 땅에 묻히고 싶어 부르르 몸 떠는 소리가 들린다며 새 터전을 찾아 나서실 어머님.

늙을수록 땅을 향하여 허리 더욱 굽게끔 타고난 숙명의 지향성(地向性)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