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풍경 / 이명진
바람이 분다.
바람은 가로수 잎을 살짝 건드리고, 상가의 낡은 나무문짝을 흔들다 지쳤는지 내 가슴을 호되게 후려쳤다. 휘청거리는 몸뚱이 사이로 낯선 거리의 풍경들이 곤두박질친다. 움직이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를 환상은 두 다리에 억지로 힘을 보태며 서 있게 만든다. 수많은 사람들, 검은 피부색, 권위적인 위압감을 나타내는 콧수염, 유독 번뜩이는 큰 눈동자, 펄럭이는 바지 사이로 숭숭 털이 드러나는 종아리, 이방인을 위 아래로 곁눈질 하고 있는 남자들,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얼굴을 돌리며 키득키득 웃는 화려한 원색의 옷차림과 액세서리로 치장한 여자들. 그들은 모두 인도 사람이 분명했다.
어깨가 마주칠 정도로 붐비는 콜카타 거리였다. 그곳에서 인력거의 숫자를 헤아리는 일은 바보들에게 주어진 놀이에 불과했다. 자동차와 오토 릭샤와 인력거들의 행렬은 사람들과 뒤엉켜 북새통을 이루며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홀로 여행 책자 한 권만 달랑 들고 찾아온 인도가 아니던가. 수많은 신들을 모시는 나라에서 스멀스멀 온몸을 감싸던 두려움과 설렘. 그 기대와 흥분은 나를 외로운 방랑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가 나를 걱정하다니 당황스러웠다. 떨어져 나간 단추 대신 옷핀을 꽂은 남자. 빠진 앞니 때문에 웃을 때면 칠순 노인네처럼 보이던 남자.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면 맨발인 뒤꿈치가 반들거리던 남자. 자전거에 속도가 붙으면 배트맨의 망토처럼 휘날리던 그 남자의 구멍 난 숄. 내 기억 속 남자는 네댓 살짜리 아들을 자전거 앞자리에 태우고 손님을 실어 나르던 깡마른 체구의 젊은 아버지였다.
한동안 콜카타 거리를 헤매는 내게 그는 저렴하게 이동을 도와 준 교통수단이었다. 숙소를 나와 릭샤꾼 대기 장소에서 순번을 기다리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였다. 그의 아들은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아빠 뒤로 숨어버리는 불안정해 보이는 아이였다. 처음에는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는 아이의 보편적인 행동인 줄 알았다.
"예쁘다, 안녕?"
말을 걸어도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던 아이였다. 아이의 얼굴은 서너 살의 천진스러움 대신, 불안한 눈빛과 상처받은 마음의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때가 꼬질꼬질 절어 버린 낡은 스웨터가 작은 아이의 가냘픈 몸을 감싸고 있다. 올 풀린 스웨터의 구멍 사이로 초겨울의 바람이 휘릭휘릭 아이의 가슴속에서 찬 기운을 뿜어냈다. 그 표정은 아무도 상대하지 않고 믿지 않는 '불신'의 씨앗으로 옹이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는 아내가 자신의 친구와 바람이 나 집을 나가 버렸다고 했다. 가장으로서 무능함을 숨기지 못한 채, 자신의 분신인 아이만은 보살펴야 했다. 아이가 다섯 살만 되면 놀이방이든 유치원이든 보낼 수 있다고 했다. 아이와 함께 자전거를 끌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그의 손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쩌면 나이가 적어 놀이방이든 유치원이든 보내지 못한다는 그의 말은 거짓말일 수 있다. 그에게는 아이를 위탁시킬 돈이 문제였을 터다. 하루종일 다리가 아프도록 페달을 밟아 번 돈으로 주인에게 자전거 임대료를 지불하고 난 후의 수입금은 그리 많아 보이질 않았다. 인도의 릭샤 제도는 그가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도와주질 않고 있었다. 계급이 존재하는 인도에서 부자들이 독점하고 있는 운수업종에 릭샤꾼들이 독립적으로 자기 자전거나 릭샤를 갖는 일은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꼴이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평생 같은 일을 대물림해야 하는 그들의 가난한 현실이 가슴 아팠다. 쉼 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는 젊은 릭샤꾼의 등 뒤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나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버지는 가끔 외박을 하곤 했다. 외박을 하고 들어오는 날이면 아버지의 양손에는 과자 봉투가 들려 있곤 했다. 그런 날 밤이면 안방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고함 소리가 듣기 싫어 이불을 뒤집어써야만 했다. 부모님의 상황을 이해 못했던 어린 마음은 무작정 어머니를 미워하고 있었다. 아무 대꾸도, 소리도 없는 아버지가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왜 어머니가 역정을 내며 분통을 터뜨리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린 마음은 과자를 사 들고 온 아버지 편이 되어 잠이 들곤 했다. 어릴 적 기억은 내 잠재의식 속에서 어른이 될 때가지 자리 잡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의 엄마가 된 후, 어머니의 고함에 대한 의문을 깨닫게 되었다. 싸움의 원인 제공은 언제나 아버지였고, 언성을 높이고 고함을 지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행동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절규였다는 사실이다.
콜카타에서 가난한 릭샤꾼의 부성애에 자꾸 관심이 갔던 이유가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어머니를 헤아려드리지 못한 탓이었을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달리는 중간 중간 아이에게 다정하게 귀엣말을 건네는 모양새가 정겨워 보였다. 바람이 나 가출한 아내의 잘못까지 자신의 무능함으로 치부해 버린 남자. 그 남자의 분신인 어린 아들이 언제나 아버지 편에 서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부자 사이를 지켜봤다.
아이의 겁먹은 표정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따끔거려 급기야 작은 선물을 준비하게 되었다. 젊은 릭샤꾼에게는 초겨울의 바람을 견뎌줄 털장갑을 골랐다. 아이에게는 구멍 뚫린 겉옷이 눈에 밟혀 가볍고 따스한 털스웨터를 선택했다. 그들 부자에게 동정이 아닌 인도에서 만든 인연 고리라 믿어 주었으면 하는 희망으로 선물을 했다. 작은 꾸러미를 받아든 그는 그들 특유의 인사법으로 고개를 좌우로 연신 저으며 고마워했다. 그 후, 짧은 순간 아침저녁으로 마주친 만남 탓이려나. 그는 활짝 웃으며 내 집 앞을 지키다 어디서 나타나곤 했다.
외국인인 내가 걱정된다며 자꾸 낡은 자전고로 앞을 막는다.
아이도 살짝 고개를 든다. 털 스웨터가 참 잘 어울렸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잘 가요, 아버지 / 김상영 (0) | 2019.12.03 |
---|---|
[좋은수필]이별 / 김경 (0) | 2019.12.02 |
[좋은수필]땡볕 / 박정순 (0) | 2019.11.30 |
[좋은수필]'그냥…'의 말 맛 / 이난호 (0) | 2019.11.29 |
[좋은수필]풍경이 말을 걸다 / 김희자 (0) | 2019.11.28 |